무슨 일을 하면 좋을지 선택할 수 있는 기쁨

계획 없이 퇴사한 직장인의 일기

by 예슬

바깥공기가 스치기만 해도 움츠러들던 겨울과 달리, 요즘은 걸으며 내쉬는 선선한 공기에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면 부쩍 봄이 다가온 듯하다. 겨울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으면서도, 따뜻해질 날씨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또 한편으론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이 내심 아쉽기도 하다. 벌써 봄꽃축제 소식이 들려오고, 세상은 무언가 곧 움틀 것처럼 생기가 도는데, 나의 계절은 아직 묵묵히 겨울을 지나고 있는 듯하다.

지난 12월, 강의를 해보기로 결심한 뒤 두 달째 공부하고, 자료를 만들고, 촬영하고 편집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내가 이 분야에 조금 더 전문가였다면, 혹은 충분히 준비가 된 상태에서 시작했더라면 이 과정이 덜 버거웠을까. 갑자기 하게 된 이 도전은 잠을 줄여가며 책상 앞에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생각보다 더디게 진행되었다. 당장 금전적 보상도 없이 몇 달을 준비만 하는 이 시간이 괴롭고 답답하기만 하지만, 남편은 내가 하는 일을 '큰 도미노를 무너뜨리는 일'이라며 나를 북돋아 준다.


이렇게 시간과 노력을 들여 무언가를 하고 있긴 한데, 과연 결과적으로 돈을 벌 수 있기나 한건지도 불투명하다. 일한 만큼 보상받는 삶을 살아오던 나에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경험은 처음이라, 나는 종종, 아니 자주 불안에 빠진다. 그럼에도 나는 이 시간을 묵묵히 감내해야 한다.


회사 다닐 땐 스트레스로 두통을 앓았다면, 지금은 불안감으로 인한 불면증을 겪고 있다. 자기 전마다 수면 명상을 하며 나의 불안감이 어떻게 생겼는지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고 있는데, 아주 묵직한 납덩이같은 모양일 거란 생각이 든다. 점점 편해지는 직장생활과, 반복되는 일상에 익숙해지는 것이 싫어서 새로움이 주는 떨림과 불편함을 감수하기로 한 것이니, 내 안에 있는 이 납덩이와 앞으로 친해져야 하는 것을 받아들여본다. 그럼에도 이 '불안' 또한 내가 '선택'했다는 사실이, 그 주체감이 이상하게도 나를 더 살아있다고 느끼게 만든다.


다음 달에는 오프라인 강의도 진행하기로 했다. 예기치 못한 '강의'라는 일에 한번 뛰어들고 나니, 우연히도 새로운 기회가 또 찾아온 것이다. 여전히 강의를 한다는 것은 자신 없지만 어쨌건 10년간 회사를 다니며 할 줄 아는 게 회사 일 밖에 없다 보니 내가 그나마 시도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쩌면 하고 싶었던 일을 하기보단,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불쑥 찾아온 봄기운처럼, 생각지 못한 또 다른 일이 나에게 찾아왔다. 팬심을 갖고 좋아하던 찻집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일자리를 제안받은 것이다. '차'는 내가 해오던 일과는 전혀 다른 영역이고 상상해보지도 못한 분야의 일이었다. 좋아하긴 하지만 엄청 진심까진 아니고, 재밌을 것 같지만 잘할 줄은 모르는 그런 일. 그럼에도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승낙을 했고 그런 나 자신이 나도 새삼 놀라웠다.


나는 늘 무슨 일을 하면 좋을지 망설이고 길을 잃었었고, 이직을 할 때도, 퇴사를 하면서도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일임에도 남들에게 물어보며 흔들리고 고민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심지어 남편에게조차 물어보지 않고 이 일을 하겠다고 결정을 내린 것이다. (물론 결정을 하게 된 나름의 이유가 있고 이 글에 다 적기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지만, 한마디로 깜깜한 어둠 속에서 갑자기 빛이 번쩍 켜진 듯한 한 느낌이었다. )


지금껏 나는 내가 하는 일을 결정할 때마다 가족, 친구, 남편, 그리고 주위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퇴사할 때에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야 하는 것이 두려워 만남을 피했었고, 잘 다니는 회사를 그만두니 남들은 다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는 뒤처지는 것 같아 주눅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실은 걸음을 멈춘 것이 아니라, 옆으로 나와 새로운 길을 걷는 것을 선택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내가 갈 길을 나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에 괜히 뿌듯하고 기분 좋은 마음이 들었다.

여전히 불안의 소용돌이 속에 있지만, 왠지 모르게 잘 될 것 같다는 마음이 조금씩 피어나기 시작했다. 불안과 설렘이 뒤섞인 꽃샘추위 같은 이 계절을 맞이하며, 나는 또 하나의 페이지를 만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