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나를 부를 때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스플리트 항구. 여름철 바닷가 특유의 따뜻하고 축축한 공기가 깔려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각에 상인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지만 큰길에는 놀거리를 찾아 헤매는 젊은이들로 붐빈다. 저녁으로 먹은 피자의 맛은 어느새 흐릿해졌지만 몸속에 분명하게 남은 염분은 비싼 값을 치르며 물을 사 먹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유럽에서 엘리베이터가 있는 숙소는 처음이다. 예약할 때는 몰랐던 사실인데 이곳은 유서 깊은 건물로 유네스코의 보호를 받고 있는 곳이었다. 아이러니하다.
하얀색 대리석 타일이 번쩍이는 꽤나 신식인 건물 1층을 지나 위로 올라가면 어울리지 않는 낡고 거대한 나무 문이 서있다.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어준 건 진부한 인사말조차 건네시지 않으시는 할머니 한 분이다. 할머니가 말없이 보여주시는 집 안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미로 같은 내부 구조를 가졌고, 낡은 바닥과 낡은 가구들, 낡은 사진들이 보인다. 우리가 묵을 방 안의 유일한 빛, 잊을만하면 깜빡거리는 전구 램프까지 더해지니 곧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가 된다. 왜 유네스코가 보호하고 있는지에 대한 답을 알 것만 같다.
밤새 돌아가는 선풍기 덕분에 바삭해진 콧구멍으로 일어난다. 에어비앤비 홈페이지에 명시되기로는 부엌을 사용할 수 없는 곳이지만 몰래 쓸 계획을 꾸미고 조심스럽게 부엌을 다가가지만, 살짝 열린 문틈으로 주무시던 할머니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필요하지도 않은 물컵만 든 채로 다시 방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물때가 껴있는 물컵을 보자 부엌을 쓸 마음도 사라진다. 어제 남은 피자와 와인으로 하루를 연다.
오후 5시에는 공항으로 떠나야 하는 나는 시내를 둘러볼지, 배를 타고 흐바르 섬에 갈지를 두고 고심에 빠진다. 하지만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의 에메랄드 빛 물을 보면서 수도 없이 당장 뛰어들고 싶은 마음을 '스플리트에서 하자.'라는 생각 하나로 억눌렀기에 어찌 보면 쉬운 결정이었다.
1시간 뒤. 흐바르 섬에 도착해 유람선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건 큰길을 가득 메운 인파였다. 항상 비수기에만 여행하던 터라 성수기가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불쾌지수가 높은 날인만큼 승원을 도발하지 않도록 말을 아낀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우선 카페인을 충전하기로 한다. 항구 주변은 왠지 비쌀 것만 같아 좁은 골목을 오르다 보니 한 바가 눈에 띄었다. 커피를 판다는 말에 주저 없이 아이스커피 두 잔을 시켰다. 셰이커에 술 대신 커피와 얼음을 넣고 흔들어준다. 이렇게 아이스커피를 다 만들고 나자 자신이 착각했다며 다시 가격을 정정한다. 아이스커피 두 잔에 한화 약 14000원. 순식간에 폭등한 가격에 놀라지만 조각같이 생긴 바텐더를 감히 나무랄 수 없다.
한결 불쾌감이 가시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으며 스페인 요새에 올랐다. 본 목적은 아니기에 빠르게 올랐다가 다시 빠르게 내려간다.
이 섬에 온 본 목적을 수행하러 간다. 도보로 이동 가능한 해변 중 가장한 적하고 아름다운 해변으로 향했다. 계속해서 이 길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인적 없이 넓은 차도, 오르막길, 돌과 선인장으로 이루어진 마른 산을 지나자 난데없이 눈 앞에 해변가가 펼쳐진다.
뛰어들어도 되는 물을 마주하니 마음이 조급해졌고, 구석에서 대충 옷을 갈아입고 바로 입수했다. 맨발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날카로운 돌을 제외하면 우리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바닷물은 얼음물처럼 차갑고, 그 맛은 쓴 맛으로 느껴질 정도로 짜다. 겁 없는 물고기들이 사람들 사이를 떼 지어 헤엄치고 있다. 뜨거운 태양의 열기는 식힐 수 있었지만 이 구역 희귀한 아시안으로써 받는 뜨거운 관심은 피해 갈 수 없었다.
대충 물기를 닦은 수건을 어깨에 걸치고, 햇볕에 옷을 말려가며 다시 항구로 돌아간다. 잘 뻗은 해안 도로를 걸으며 아까 지나온 길이 일반적인 길이 아님을 확신했다.
비행기를 놓치지 않는 마지막 배편은 곧 출발하는데 어쩐지 매표소를 찾을 수 없다. 다행히 출발 직전에 배에 승선한다. 해변가는 떠나왔지만 뻣뻣해진 머리칼과 건조해진 피부, 팔다리 살갗 위의 쌓인 뽀얀 소금과 물놀이 후의 나른함으로 아직 그곳을 느낄 수 있다.
공항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스플리트 왕궁을 잠시 들렀다. 울퉁불퉁한 바닥에도 불구 승원도 나와 함께 다녀준다. 스플리트 왕궁은 한 채의 건물이 아닌, 서울의 사대문 안 같은 곳이었다.
승원의 배웅을 받으며 공항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의 앞으로의 두브로브니크 여정이 부럽고, 혼자 두고 떠나려는 마음은 심히 안 좋다. 옆자리에 앉은 스웨덴 사람들의 목소리는 스웨덴에서 온 그를 생각나게 하고 더 마음을 심란한다.
그렇게 나는 떠났다. 승원과 나, 또는 구운 감자와 구운 계란, 구감 구계는 이제는 떨어져 있지만 같은 날 같은 곳에서 태양에 맞서느라 생긴 영광의 어깨 화상(과숙)으로 서로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