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도 거짓말도 못하는 인간
꼭 적절한 등산용 신발을 가져오라던, 없으면 빌려오라던 이 여행의 주최자의 말을 한 귀로 흘린 채 아무런 기대 없이 친목이나 다지자는 마음으로 떠난 바이오 버디 여행. 애초에 가기로 한 것도 안간다는 나에게 다시 안 가냐고 물어보는 알라나의 말에 거짓말도 거절도 못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여행 전 날까지도 며칠 전 끝마친 여행 후유증으로 취소 직전 단계까지 이르렀지만 나보다 먼저 취소한 사람들이 있었고, 선뜻 말하지 못하고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출발한다.
오전 7시. 토마스의 차에 올라탄 나는 와인 두 모금에 정신을 잃었고 3시간 30분 정도를 달려, 국경을 넘은 후 Breitach Parkplatz 2에 도착한다. 목적지에 다가갈수록 먹구름이 진해지더라니, 세찬 빗줄기가 우리를 반겨준다.
범상치 않은 사람들의 옷차림과 주변 풍경. 트렁크에서 등산화를 꺼내 신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알라나에게 농담처럼 우리가 오를 산에 대해 물었다.
나들이를 예상했던 인간은 이 시점이 돼서야 내일 오르려는 산이 알프스 산맥 중 하나이며, 적절한 신발과 복장을 외치던 목소리가 과장이 아니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비를 피해 오두막에 들어가 앉는다. 독일어지만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는 좀 더 투박함이 묻어난다. 비가 그친 틈을 타 짧은 산책을 떠났다가 표 살 돈을 안 가져와서 외곽을 살살 돌다 돌아왔다.
드디어 도착한 숙소.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떴다. 이 숙소는 테우 다름슈타트에서 운영되는 곳으로 학교 학생들은 더욱 저렴하게 이용이 가능하다. 방 안에 콘센트가 하나도 없었던 이전 유스호스텔 숙박 경험을 떠올리며 챙겨 온 문어발이 무색하게 훌륭한 시설을 갖춘 숙소. 운 좋게도 2인실이다.
18시 30분. 식당에 앉아있으면 자리로 음식을 가져다주신다. 보통 독일 전통음식들이 나오고, 오늘의 메뉴는 비너 슈니첼. 비너 아트 슈니첼이 아닌 비너 슈니첼의 차이를 강조하는 알라나.
이번 주말 동안 이 숙소에는 우리 일행뿐만 아니라 역시 테우 다름슈타트 생명과학과에서 온 ‘유전자 변형 기계 국제대회’를 준비하는 팀도 함께다. 이 구역 마당발의 주도로 축구 경기를 시작하기 전처럼 모두와 악수하고 인사하는데, 그동안 너무 편한 사람들이랑만 어울려서일까,,, 인사만으로 내 사교성이 밑천을 드러내고야 만다. 역시 어색해하는 룸메이트와 함께 도망치듯 숙소로 들어와 잠시 안정을 되찾는 시간을 가졌다.
이 여행을 추진한 스테판은 특히 맥주를 좋아했는데, 그는 차 트렁크 가득 맥주 궤짝을 채워왔다. 맥주를 홀짝이며 놀다 보면 여름에도 불구, 높은 고도 탓에 한두 명씩 추위에 나가떨어지기 시작한다. 봄에 스톡홀름에서 구입해 입을 일이 없을 것 같아 속상해하다 비옷 대신 챙겨 온 겨울 점퍼가 유난히 사랑스럽다.
추위를 피해 지하실로 자리를 옮겼는데, 눈 앞에 있은 탁구대. 더 이상 게임하던 카드는 내 눈에 들어오지 않고 탁구를 치고 싶은 마음이 솟는다. 이제는 까마득한 길고 어두웠던 지난겨울, 비공식 다름슈타트 맛집에서 연마한 기억을 떠올리며 탁구라켓을 집어 든다.
탁구대는 하나. 하지만 공을 넘기고 한 칸씩 돌아가며 치는, 플레이어가 5명 이상이어도 할 수 있는 룰을 사용해 다함께 탁구를 칠 수 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뛰어다니다 땀에 절어 복귀한다. 탁구가 있는 한 이 여행은 재미없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