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면 편한 길
일기예보에 따르면 우리가 머무는 내내 비가 오다가 떠나는 날인 일요일부터 맑아진다고 한다. 하지만 다행히 오늘 아침 날씨는 맑다. 소들이 풀 뜯어먹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이 곳.
07:30 오전. 아침은 조식 뷔페. 이 지역에서 생산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플레이팅으로 미루어보아 알가우 지방에서 생산된 신선한 크림치즈라고 믿고 먹으니 시제품에 비할바가 아니다. 야무지게 점심까지 챙긴 후, 일정을 시작한다. 오후에 비가 예보되어 있으므로 원래 일정보다 빠르게 일정을 시작한다.
올챙이가 보이는 맑은 호수, 눈에 띄는 아무에게나 사진을 부탁했는데 나의 시간, 그의 시간, 핸드폰 전력 모두 아까운 상황이 벌어진다. 젖소들이 풀을 뜯어먹고 있는 들판을 지나 지칠 때쯤이면 폭포가 나온다. 흘러내려오는 물은 바위에 튕겨 나와 더위를 식혀준다. 더 올라가 도착한 오두막에서 (운 좋으면 레베에서도 살 수 있는) ‘산 위’ 오두막에서만 판다는 레모네이드도 마시고, 싸온 점심도 먹었다.
등산의 왕도는 쉬지 않고, 눈 앞의 길에 한 발씩 내딛는 것. 자칫 쉬어가다간 다시 일어날 수 없음을 몰랐던 4명은 올라오지 못한다.
첫날의 산뜻한 느낌을 살려 더 올라가 보기로 한다. 비가 내리긴 하지만 안개분사 노즐을 장착한 듯 불쾌하지 않다. 한결같은 오르막길에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고 급한 대로 초콜릿을 처방받아간다.
깎아지른 절벽 내리막길을 가로질러 난 좁은 길. 태양의 보살핌이 닿지 않은 이곳은 눈이 쌓이고 채 녹기도 전에 얼기를 반복하여 5월의 빙판길을 만들어냈다. 우리보다 먼저 정상에 갔다 내려오던 아이젬 팀을 마주쳤는데 중간쯤 걸어오다가 주섬 주섬 자켓을 벗더니 이를 썰매 삼아 한 명씩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이를 지켜보는 할미의 마음에 뜨거운 무언가가 이는 듯하다.
아버지께서 누누이 말씀하셨던 삼점지지의 가르침을 되뇌며 거의 기다시피 길을 건넌다. 등산화, 비옷은 챙기지 않았지만 장갑을 챙기라는 사소한 디테일을 챙겼기에 가능했다.
정상(1982m). 비구름에 가려 아래가 보이지 않아 신비한 느낌이 물씬 풍긴다. 산 꼭대기에 방명록에 이름 석자를 남기고, 아래에서부터 지고 온 맥주를 한잔, 그리고 비가 많이 오기 전 서둘러 하산.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아까 지나온 빙판길의 난이도는 3단계 정도 업그레이드되었다. 나를 포함한 신발 밑창이 매끈한 몇몇 사람들에게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위협으로 다가온다. 이 길을 건너느니 차라리 마음먹고 내리막으로 굴러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등산화를 신은 스테판을 등산스틱 삼아 한 발씩 내딛는 나는 걸음마를 못 뗀 그 시절로 되돌아간다. 철들고 오랜만에 엉덩방아 연속으로 찍어본다. 올해 내 위시리스트 상위권에 등산화가 랭크되는 순간이다.
운동을 할 때 가장 지치는 길은 돌아오는 길이다. 이미 봤던 풍경, 특히 내리막길은 잡생각을 없애줄 고단함의 부재로 더욱 나를 지치게 한다.
샤워를 통해 더럽고 축축한 인간에서 그냥 축축한 인간으로 돌아왔다. 저녁은 햄인지 고기인지 정체모를 스테이크. 이래저래 과자를 너무 많이 먹어 저녁은 적당히(lagom) 먹고, 또다시 지하실에서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지옥의 탁구 훈련을 시작한다. 물론 배출하는 땀만큼 건강한 효모가 만들어낸 음료로 수분을 보충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지덕체 중 지에도 항상 힘쓰는 우리는 훈련 도중에도 이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종이에 이름을 써 각자 죽일 사람을 뽑고, 만약 자신을 노리는 살인마에게 어떤 것이든 건네받으면 죽는 게임. 그날 난 여러 번 죽고 새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