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시가
2019년 5월 8일 수
자킨토스는 케팔로니아 아래에 위치한 섬으로, 그 규모는 케팔로니아보다 작지만 더 잘 알려진 곳이다. 태양의 후예의 촬영지이기도 한 shipwreck beach가 가고 싶다는 의견을 수렴하여 그곳으로 간다.
항구로 가는 버스를 타러 나가는 길. 아래층에는 어제는 안 계시던 주인 부부가 계신다. 우리의 일정을 들으시고는 직항 배가 있다는 것에 의아해하시며 친히 예약해둔 (5)자킨토스 숙소와 통화까지 해주시며 확인해주셨다. 심지어 항구에 도착하면 숙소에서 우리를 데리러 나와계실꺼란다. 첫 자동차가 한국산이라는 말씀을 꺼내실 때부터 출구를 향해있던 내 발이 민망해지는 순간이다. 할아버지와 와일드 그린을 손질하고 계시는 할머니에게서 언어는 다르지만 친근함이 느껴진다.
어젯밤에 파악한 바로는 이곳은 바다가 보이는 길을 따라서 모던한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즐비한 곳이다. 아침으로 캐러멜 와플을 먹은 후, 바다 쪽으로 놓아진 다리 위를 걷는다. 잔뜩 구름 낀 날씨와 상관없이 항구도시 특유의 풍경을 보자 기분이 웃음을 되찾기 시작한다. Caretta caretta. 비수기는 비수기인지라 거북이는 물론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 점차 구름이 걷히기 시작한다.
산책을 마치고 한 시간 남짓 버스를 타고 항구도시 Sami에 도착했다. 이곳 역시 이오니아 해안가를 따라서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표를 사고 바닷바람으로 간을 맞춘 맨 빵을 씹어먹으며 배를 기다린다.
불안하다. 출항까지 20분도 안 남았는데 배가 오지 않는다. 관계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저 멀리로 가보라고 해서 갔더니 보이는 건 고가의 개인 요트들. 다시 여행사로 물어보러 가는데 (5)오토바이를 탄 아저씨가 원래 있던 자리에서 기다리면 된다고 말해준다. 근데 이 아저씨 심상치 않다. 보통 엉덩이가 보인다면 엉덩이 골이 보이기 마련인데 이 분은 바로 볼일을 봐도 무방할 거 같은 과감한 노출을 선보이고 계셨다.
저 멀리서 작고 낡은 여객선이 다가온다. 어쩐지 기다리는 사람이 별로 없더라니 여객선은 10명도 안 되는 사람만을 태운 후 출항한다. 바나나보트 저리가라로 격렬하게 흔들리는 배는 우리에게 멀미하라고 강요하는 듯하다. 본디 그리스 사람들은 ‘σιγά σιγά(시가 시가)’, ‘천천히 천천히’를 중요시한다던데 정말 배가 예정 도착시간보다 한 시간 늦게 도착했다. 뇌가 너무 흔들려서일까. 내려서 내일 돌아가는 배편이나 알아보려고 들어간 여행사에서 덜컥 투어까지 신청해버렸다.
숙소 주인분은 정말 (6)FIAT을 몰고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따님이 독일 본에서 석사과정을 하고 있단다. 가는 길의 어색한 공기를 깨고자 숙소 주변의 좋은 식당을 물었는데 잘 모르겠다며 남편한테 물어보고 대답해주신단다.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는데 부담을 준거 같아 마음이 무겁다. 아주머니는 정말 한참 후에 추천 식당을 알려주셨다.
비수기, 초저녁 라가나스 해변은 성수기의 뜨거운 열기를 상상하게 만든다. 두 달 뒤 핫플레이스에서 춤추고 있는 사람들. 다들 이번에는 너무 부지런했다. 분명히 추운 날씨인데 우리를 제외한 모두 한여름 복장이어서 어리둥절하다. 두 달 뒤 성수기에서 자신도 모르게 타임워프 당한 사람들일까?
숙소에서 추천받은 식당. 어니언링, 지역 물고기와 소고기 조림을 시켜먹었다. (7)주인은 우리가 올 줄 이미 알고 있었고, 매우 친절했지만 사사로운 감정으로 정량을 어기는 일은 용납하지 않는 원칙적인 사람이었고, 딸들은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풍차돌리기를 선보이며 돌아다닌다.
점점 더 추워오지만 노을은 수시로 바뀌어 눈을 뗄 수 없는 작품이다. 해변가를 나오면 길거리에는 네온사인이 꺼진 유흥업소들이 즐비하고, 이에 들어갈 곳을 못 찾은 사람들이 배회하고 있다. 규모가 작은 라스베이거스가 망한다면 필시 이런 모습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