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3)그리스 서부: 자킨토스 투어

다시온다면 스카프를 챙길 것

by Terry

자킨토스 섬 투어를 하는 날. 이른 아침, 서둘러 나가는 와중에도 집에서 챙겨 와 내 마음 한켠의 가장 무거운 짐이었던 반쪽짜리 아보카도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챙기고, 투어 버스에 올랐다. 쾌적하고 넓은 버스. 가이드 흉내를 내는 운전기사 한 명, 어떤 경로로 얼마를 내고 투어에 참여했는지 모를 사람들과 함께하는 하루다.


[1]Strans Hill. 불법 정차된 버스에서 내려 잠시 언덕을 오르면 그리스 국가를 작사한 사람의 대리석 흉상이 있다. 그 옆에는 원형의 연설 연습장이 있는데. 원의 절반은 관중들이 앉을 수 있는 계단이 위치해 막혀있고, 나머지 절반은 뻥 뚫려있는 모양이다. 연설장 한가운데 서서 말하면 소리가 계단에 부딪혀 말하는 사람에게 다시 돌아온다. 즉, 자신은 되돌아오는 자기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계단의 관중들은 이 두 번째 소리는 들을 수 없다. 가이드는 한 사람씩 자기소개를 시켰고, 실제로 해보니 희한하게도 잠시 후 내가 나에게 또박또박 말을 걸어온다. 가이드의 주도로 투어를 온 사람들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전통 그리스 춤을 춘다. 우습고 유치하지만 재밌다.


[2]Xigia sulfur beach. 해안가 옆 동굴에서 나온 황을 함유하고 있는 물로 피부에 좋단다. 은은한 달걀 향이 풍기는 모래사장 한가운데에서 바지를 탈의하기 시작하는 중국 아저씨. 같은 인종으로써 어쩐지 책임감을 느껴 살짝 긴장했지만 다행히 안에 수영복을 입고 계신다. 물에 들어갈 수 있을지 몰랐던 터라 그림의 떡 같은 바다를 구경만 하다 차마 못 보겠어 절벽 위로 올라 아침에 만들어 온 샌드위치나 먹는다.

[3]Makris Gialos beach. 가이드는 말없이 문을 열어준다. 모래사장이 아닌 돌로 이루어진 해변가. 따뜻하게 달구어진 돌에 잠시 몸을 뉘여본다.
[4]Ship wreck beach. 자타공인 자킨토스 여행의 하이라이트. 1980년 10월 2일 밀수품을 운반하던 배가 그리스 당국에 쫓기게 되자 배를 나바지오 해변에 버렸다고 한다. 사방이 절벽인 작은 해변가에 난데없이 배가 버려져있는 이색적인 풍경은 드라마 태양의 후예 촬영지로 더 익숙하다. 하지만 이곳은 보트 없이는 들어갈 수 없어 개인 보트가 없는 우리는 투어를 통해서 올 수밖에 없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보트에 오른다. 선장의 짜릿한 보트 운전실력에 환호하며 바다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 것도 잠시, 30여분 소금으로 간을 한 세찬 바람을 맞으면서 달리니 도착할 즈음에 되어서는 모두 가지고 있는 최대치로 옷을 껴입은 채, 잔뜩 웅크리고 있다. 바닷바람을 핑계 삼아 사정없이 내 얼굴을 내리치는 내 머리칼을 보니 드라마 속 강모연씨가 머리에 스카프를 두른 건 결코 패션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눈 앞에 난파선이 있지만 배는 정박하지 않고 그 앞을 천천히 오간다. 웅성웅성대는 사람들. 얼마 전 옆 절벽이 부서져 내린 사고로 인해 안전상의 이유로 해변가에 내릴 수 없단다. 사람들은 좁은 갑판 위에서 배가 방향을 바꿀 때마다 함께 움직이며 애써 웃어본다. 이 상황보다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던 여행사가 더 얄밉다.


설마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진 않겠지라고 넌지시 던진 물음은 사실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처절한 울부짖음이었다. 하지만 그 불안한 예감은 적중하여 다시 긴 항해를 시작한다. 중간에 [5]Blue cave를 들른다고 이 항해가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출발했던 선착장으로 돌아가니 양지바른 곳에서 편하게 쉬던 가이드가 활짝 웃으며 맞아준다. 그리곤 꽤 오랜 시간을 달려 레스토랑 하나만 달랑 위치한 외진 곳에서 버스를 세우고 1시간 동안의 자유시간을 준단다. [6]Orizodes(restaurant/skybar)라는 이름의 레스토랑. 메뉴판을 채 보기도 보기 전에 물을 먹이려는 점원. 이 순간을 위해 틈틈이 단호함을 수양해왔다. 얼떨결에 물을 마시게 된 테이블에는 한 사람 당 1리터짜리 물병이 하나씩이 놓여있다. 개중에 저렴한 그리스 전통 디저트와 커피나 마셔보기로 한다. 견과류가 잔뜩 들어간 디저트에서 우리네 전통 음식인 호떡 맛이 난다. 새로운 버스가 올 때마다 사람들은 밀려들어왔지만 오랜 시간 기다리며 음식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음식을 받은 사람도 만족스러워 보이는 사람은 없다.


[7]Navagio lookout. 나바지오 해변을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곳. 낮은 수풀들을 헤치며, 울퉁불퉁한 돌길을 따라 올라간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보이는 절벽. 그리고 아까 봤던 난파선도 보인다. 온통 갈색 아니면 초록색인 이 곳에서 원색의 꽃들이 올려져 있는 비석은 젊은 나이에 이곳에서 추락사한 청년을 기리고 있다.


이제 프로그램에 있던 2000년 된 올리브 나무를 보러 가는 줄 알았는데 투어가 끝이란다. 오늘 초록 바지를 입은 이유의 일부는 올리브 나무였으므로 더욱 황당하여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되찾고 싶지만 시간상 나도 배를 타러 가야 해 어쩔 수 없이 항구로 향하는 차에 올라탔다.


다시 케팔로니아로 돌아가야 하지만 직항이 없어서 킬리니를 경유해서 가야 한다. 통통배를 타고 왔던지라 에스컬레이터까지 있는 거대한 규모의 여객선에 오르는 우리는 감탄하며 시골쥐 티를 낸다. 배가 움직이는 것도 창문을 한참 쳐다보고 있어야 알 수 있는 시멘스 침대에 견줄만한 안정감. 배는 탔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케팔로니아 예상 도착 시각은 23시인데 항구에서 숙소까지 어떻게 가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 숙소에 이메일로 질문까지 보내고 나니 내가 손 쓸 수 있는 건 없다. 도착한 나에게 책임을 미루고 항해를 즐긴다. 버스가 있다는 답장을 받고 찾아보니 22:30에 막차가 있다. 배가 정박한 시각은 22:45분경. 생매장을 당하는 듯한 15분을 견뎌내고 혹시나하는 마음에 선원에게 물어보니 대답 대신 (8)그의 손가락이 향한 곳은 우리가 타고 온 바로 그 배의 자동차 칸에서 나오는 버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사실이었다. 우리는 내내 버스와 함께였다.


버스 한 시간을 포함해 총 네 시간이 걸려서 도착한 숙소 문을 두드리니 불이 켜지고 거구의 할머니께서 나오신다. 숙소로 안내하는 할머니의 발걸음은 청소부 베포의 걸음걸이를 가지신 분이다. 한 걸음. 휴식. 한 걸음. 휴식. 오늘 하루 제대로 된 식사를 한 끼도 하지 못한지라 배에서부터 도착하자마자 캐리어 속 열라면 두 봉지를 먹을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부엌도 전기포트도 없다. 화장실 뜨거운 물을 잠시 떠올렸지만 난 잘 큰 어른으로 참아내야 한다. 그렇게 성장통을 겪으며 애써 잠을 청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2)그리스 서부: 자킨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