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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ry Oct 01. 2019

(1)영국: 광교산 아래의 영국

추석에 떠난 영국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을만한 일이지만 어쩐지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이 있다, 이를테면 벌에 쏘이는 일. 그것도 달마다.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독일 생활, 나 혼자만 기억하는 그 기억들은 어느덧 개강의 여파로 기억저장소 어두운 구석으로 강등되었다.

 추석 당일, 새 등산화를 시험한다는 명목 하에 집을 나와 등산을 한다. 조상들을 만나 뵈는 진정한 의미의 명절을 몸소 실천할 뻔한 순간들을 겨우 사양하며 힘겹게 광교산 정상, 시루봉에 올랐다. 하지만 정상에 올라선 5분 뒤의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뜻밖에도 말벌의 공격. 억울함으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과 미처 다 먹지도 못한 고구마를 수습하지도 못한 채 바로 하산하기 시작한다. 내려오는 길, 내 머릿속은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약 한 달 전 런던 여행의 기억으로 가득 찬다. 말벌의 독 때문일까. 어쩐지 내려가는 길은 힘들지 않다.

갈 곳 잃은 오른손

런던 여행의 서막


 오랫동안 가장 유력하고 유일한 후보였던 꿈의 휴양지 포르투갈을 제치고, 반값 항공료라는 카드를 내세우며 단숨에 우리들 마음속 선두로 자리 잡은 후보는 엉뚱하게도 런던이었다.


 출발일이 다가올수록 한 일행으로부터 하루가 넘어가기 무섭게 밀려오는 숙소 예약 독촉과 여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연이은 에어비앤비 예약 거절에 좌절한다. 거기다 함께 여행 가기로 한 일행의 부득이한 여행 취소까지. 여행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누구 하나 장담할 수 없다.


2019년 8월 2일

: 하루가 몇 시간인지는 우리가 정해.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떠난다. 아침 7시 비행기를 타야 하는 나로 인해 새벽 3시 44분부터 칼스호프 1401호에는 불이 훤히 밝혀져있다. 에어라이너 안에서 마주한 셋, 각자의 옆좌석에는 천의 신축성을 시험하는 듯 한껏 부풀어 오른 '기내용 배낭'이 항공사 기내 수화물 규정에 들어맞는 척 하나씩 놓여있다.


 약 두 시간도 안 되는 비행시간. 라이언에어는 이 짧은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부수입을 창출하여 저렴한 항공권 값을 만회하기 위해 분 단위로 일정을 짜놓았다. 기내 음료 서비스, 주전부리 판매, 면세품 판매, 복권 판매까지. 이 일정을 소화하려 분주히 오가는 승무원들에 치이는 복도 쪽으로 노출된 내 왼쪽 상반신 절반은 결코 편안하지 못했다. 선잠에서 깨어 잔뜩 예민해진 나에게로 다가오는 몹시 밝고 개운한 얼굴의 채민과 이와 다르게 오만상을 짓고 있는 상일. 둘의 사정은 이러했다. 복도로 쓰러져 나간 자신의 머리를 살포시 올려 제 자리로 돌려준 기억을 제외하면 하늘 위에서의 기억이 없는 자와 비행시간 내내 목이 터져라 우는 아기로 인해 한숨도 못 잔 자.


  스탠스테드 공항에 도착해 이번이 영국 방문 4번째라며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는 자칭 영국 전문가 상일의 지휘를 따라가 보기 좋게 공항을 헤맨다. 직원에게 '영어'로 물어 버스 정류장으로 찾아갈 수 있었다. 햇살 한 줌 없이 구름 빽빽한 하늘을 보며 '과연 영국답군.' 이라며 18세기 산업혁명 감성에 젖으려는 찰나, 아직 오전 10시밖에 안돼서 그렇다며 흥을 깨는 영국 전문가. 전문가다운 냉철한 판단이다.


 오전 8시 45분 버스를 타기로 예약했지만 밥 먹듯이 연착하는 저가 항공 승객들을 배려해서인지 선착순 제도로 운영하고 있었고, 긴 줄에 서있는 사람들은 잔뜩 화가 나있다.


닥터후 아는 사람 ?

베이커 가에 도착. 고독한 사립 탐정이 살기에는 관광객으로 다소 붐빈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 무심코 돌아본 오른쪽, 이상한 낌새를 느끼며 왼쪽, 반대차선을 보기 위해 다시 오른쪽. 세 번을 돌아봐야 하는 곳. 이곳은 영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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