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하는 여행의 여행지는 결국 나 자신이었다.
한 개체 내에서 발생하는 소진화의 일환으로서 새로운 사람과 친밀해지는 기능이 쇠퇴한 지 오래라고 생각했었다. 당연하게도 한국을 떠나오면서 혈혈단신 혼자 고독한 여행을 하는 미래를 상상했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보다 게을렀고, MBTI 성격 유형 결과가 E로 시작하는 사람들을 만났으며, 기능이 퇴화되기 전에 형성한 유대관계로 인하여 결과적으로 나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가장 저렴하게 편하게 크로아티아로 가는 방법은 헝가리까지 비행한 후, 야간 버스를 타고 크로아티아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헝가리행 저가 비행 편 20유로, 예약 당시 착오로 오후 비행기가 아닌 오전 비행기로 잘못 예약했지만 변경 수수료가 30유로여서 그냥 타게 된 아침 비행기.
전날 처음 가 본 비어가든 분위기에 취해 마신 맥주 때문에 잠든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집을 나서야 했다.
2019년 6월 13일
공항버스 안, 매우 피곤하다. 앞에서 보면 규정을 준수하는 듯 하지만 측면에서 보면 규정 폭의 약 2배가 넘는 가방을 보며 불안한 마음이 슬그머니 생긴다. 돌아오는 비행기의 수화물 규정을 확인했다. 며칠 전 도서관에서 철저한 조사를 기반으로 계획한 여행 일정은 헝가리-스플리트-플리트비체-자그레브-프랑크푸르트. 내 눈에 보이는 건 스플리트 발 프랑크프루트 행 비행기표. 메두사 머리를 본 듯 순식간에 온몸은 굳어간다.
헝가리에 대해서 내가 조사해 간 건 단 맛집 세 군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숙소 문제를 수습하고 나가느라 터미널에는 나 혼자다. 벌써부터 순조롭지 못하다. 버스 매표원의 도움으로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 구글맵은 와이파이 없는 환경에서는 작동하기를 거부하고 있었고, 큰 박물관을 보고 내린 정류장 주변은 아무것도 없다. 모르겠으면 일단 직진. 모순되게도 야무지게 준비해 온 토마토를 베어 먹으며. 오아시스와 같은 스타벅스 앞 화단, 와이파이를 빌려 지도를 다운로드한 후에야 비로소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깨닫는다.
내가 검색한 맛집 중 하나인 핫도그 맛집을 찾아가는 길. 마주치는 사람마다(최소 6명) 들고 있는 흡사 빅토리아 시크릿 스타일 비닐봉지의 출처를 알아야겠다. 처음 목표였던 핫도그 집은 지나친 지 오래지만 아무 데도 들어가지 못한 채 관찰과 추리, 수색과정을 반복하여, 그 가게를 찾아냈다. 허름한 가게. 유로는 물론 카드도 받지 않을 거 같다는 판단이 선다.
그때의 나는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내가 그 상황에 대처하는 법은 다음과 같았다.
• 주변 아무 ATM기를 찾아 헝가리 포린트를 뽑으려고 카드를 넣는 순간 엄습하는 불안감에 후퇴.
• 1km가 넘는 거리의 은행 안 ATM기로 향해 인출에 성공한다.
• 다시 온 길을 걸어 돌아와 가게로 들어간다.
드디어 입성한 가게 안에는 포린트 가격과 오늘의 환율을 적용한 유로 가격이 안내되어 있었고, 카운터에는 세련된 카드기기가 놓여있다. 땀을 너무 흘린 나머지 눈물조차 흘릴 수 없다.
강 너머에서 강을 바라보며 먹으려고 했는데, 이것 저곳 기웃거리며 걷다 보니 강 너머는커녕 강도 보일 기미가 안 보인다. 더위에 지쳐 공원에서 밥을 먹었다. 케밥을 입에 넣는 순간 사회의 부조리가 느껴진다. 이 세상은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 케첩에 비벼놓은 보리밥, 검댕이가 묻어있는 닭고기, 맛보다는 양으로 승부하는 빵. 고개를 들었을 때 내 앞에는 검은 부리를 벌린 채 초점 없이 나를 쳐다보고 있던 까마귀가 있다. 식사 준비를 마친 채 군침을 흘리며 내 영혼이 완전히 잠식되길 기다리고 있다.
국회의사당 앞 “그늘 진” 벤치. 이제야 헝가리 관광정보를 찾아보는데 부다페스트는 부다 지구와 페스트 지구가 있으며 부다 지구는 아직 발도 들여놓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유람선 침몰 사고가 있은지 2주가 지난 시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유유히 도나우강을 오가는 유람선들, 유람선 표를 홍보하는 부스들을 지나친다.
드디어 강을 건너, 왕궁으로 올라가려는데 눈 앞에 펼쳐진 매혹적인 잔디밭. 몇 시간 만에 10배 이상 값이 뛴 물 한 병을 사들고, 더위를 식히려 그늘에 누웠다. 짐을 걱정하다 눈을 뜨니 20분이 훌쩍 지나있었다.
왕궁에서 내려오는 길에 본 누군가의 손에 들린 빈티지샵 봉투(눈이 있는 게 꼭 좋은 일일까). 남은 시간 동안 빈티지 쇼핑을 하기로 긴급 결정한다. 부다 지역의 아무 빈티지샵을 하나 정하고 그 방향으로 걷는 길. 좁은 문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에어컨 바람이 너무나 달콤해 홀린 듯 이끌려 들어간다. 쇼핑몰 2층 벤치는 지친 탕자와 같은 나를 거두며 자신의 품을 내어주었지만, 벤치의 양자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에어컨을 더 쐬고 싶었는지, 아니면 포근함을 돈으로 내고 싶었는지 나가는 길에 들른 마트. 점원이 진열 중인 2L 딸기에이드를 보고 옆구리에 끼워놓았던 물을 내려놓았다. 어리석었다.
도착한 빈티지 샵. 분명 여기가 맞는데 건물 문이 잠겨있다. 억울한 마음을 호소할 곳이 없다. 그나마 핸드폰 배터리도 없어, 충전을 위해 콘센트가 있는 가게들을 찾다가 베이글 가게에 들어갔다. 작은 가게 안 두 점원이 내가 입을 떼기만 하면 어떤 베이글이라도 만들어 줄 태세로 서있다. 콜라 한 잔에 책을 읽는척하다 마감시간이 다가와 눈치껏 다시 길을 나섰다. 생각해보니 책도 들고 다녔네.
케밥집에서 산 디저트를 먹으며 하염없이 걸어 나간다. 지하철역을 지나치는데 도무지 그냥 지나쳐 갈 수 없다. 티켓을 끊고 대충 서있는 아무 버스나 올라타 봤는데 유턴해 내가 온 빈티지샵 앞으로 가는 버스. 다행히 페스트 지구에서 봤던 트램으로 갈아타 돌아갈 수 있었다.
더 이상은 무리다. 지나가면서 보이는 모든 것들에 불만을 품으며 씩씩대며, 머릿속은 '스타벅스'라는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투우소 한 마리가 있다. 먼 타국에서 스타벅스는 커피 전문점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적어도 이곳은 날 실망시키지 않는다.
가방을 내려놓고, 젖은 티셔츠가 마르기 시작하자 한결 몸이 가볍다. 세 시간의 휴식.
승원의 도착 소식에 마음은 급하지만 가는 길이 너무나 멀고 힘들다. 하지만 멀리서부터 보이는 익숙한 분홍가방을 보니 다 잊히고 반가운 마음만 남는다. 더군다나 입에 거미줄 칠뻔하다 만났으니 더욱이 그러하다. 오늘 하루를 바쁘게 쏟아내자 놀라며 가방을 맡기지 그랬냐는 그녀의 질문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국회의사당 야경을 끝으로 빠르게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