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탈리아: 바티칸 시국

나의 MBTI는 INTJ다.

by Terry

침대가 불편해 이리저리 뒤척이다 바닥에 떨어진 후에야 잠에서 깼다. 캡슐로 에스프레소를 내려 설탕을 한 봉지를 붓고, 한 입에 털어 넣는다. 이렇게 마시면 하루종일 목구멍에서 향긋한 에스프레소 향이 맴돈다던대 그렇다면 양치를 하면 안 되는지 고민에 빠진다.

평화로운 아침이다. 로마 안의 작은 나라 바티칸 제국에 입국해야 하는데 긴 줄을 설 생각에 나가기 두렵다. 줄을 서며 먹을 젤라또를 사러 숙소 옆 가게로 들어갔다. 꽤 유명한 곳인지라 짧은 한국어를 구사한다. 어디서 배웠는지 참 별로다.


길을 건너 성벽을 따라 길게 늘어선 줄 끄트머리에 합류했다. 세계 국기들로 둘러싸인 명함을 잉크젯 컬러 프린터기로 인쇄한 종이를 투명 철에 대충 욱여넣은 조잡한 모양새의 명찰을 매고 우리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있다. 인도 억양이 강한 영어를 구사한다. '기다리는 동안 어디 나를 영업해서 조금이라도 즐겁게 해 봐라.'라는 마음가짐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돌발상황으로 아빠는 줄에서 이탈해 그 사람 곁에 간다. 얼떨결에 줄을 이탈하고 만다.


자칭 공식 직원이 앞장서고, 아빠, 엄마와 나, 그리고 부부로 보이는 외국인 한 쌍이 뒤따른다. 도착한 곳은 구비된 것이라고는 컴퓨터 한 대, 프린터기 한 대, 그리고 카드 결제기, 그리고 그 옆의 스테이플러가 전부인 사무실이었다. 철저히 필요한 것만 구비해놓은 모양새다.


우리를 데리고 온 남자는 다른 고객을 찾아 나섰고, 사무실 안의 퉁퉁한 인도 남자는 컴퓨터 앞에 앉아 결제를 재촉했다. 우리도, 같이 온 외국인 부부도 결제를 마치고, 종이 한 장을 받았다.


이 사건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절대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무실에 가는 길에 부부와 대화를 해 본 결과 그들도 미심쩍어했고, 나 역시 사기꾼의 냄새를 맡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인도인이 섬기는 신의 가호였을까. 아무튼 소극적인 의심으로 인한 비극의 막은 올라가고 있었다.


종이 한 장은 약속한 대로 줄 서기 없이 바로 입장이 가능하게 했다. 그들은 엄청난 혜택이라도 되는 듯, 학생 할인도 된다고 호들갑을 떨어댔지만, 이미 몇 배씩 가격을 부풀려놨기에 시세보다 비싼 값을 치른 셈이지만 자신들의 상품이 값이 싸다고 홍보한 적은 없으므로 딱히 할 말은 없다.

바티칸 제국에 들어서 방대한 전시물들을 보는 것은 웬만한 체력으로는 당해내기 힘들었다. 특히 무리를 지어 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이들과 부딪히지 않으려는것만으로도 큰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바티칸 미술관을 나와 성 베드로 성당을 보러 간다. 인도인은 그 종이로 성 베드로 성당도 줄 서지 않고 입장이 가능하다고 했었다. 관계자에게 물어 안된다는 대답을 듣는 데까지 낭비한 시간에 분노하며 줄을 서러 가는 우리를 향해 소리치는 사람이 있다.


어린아이가 회사원 놀이를 하려고 만든듯한 조잡한 명찰, 인도 억양을 구사하는 남자는 바티칸 박물관 표를 샀냐며 건들거리며 묻는다. 오호라. 잘 걸렸다.


성큼성큼 다가가 '네 친구한테서 샀다'로 운을 떼기 시작해 네가 성 베드로 성당의 공식 직원이냐고 물으니 자신의 장난감 같은 명찰을 들이민다. 홈페이지를 말하라는 말에 말을 못 하는 그에게 그렇게 수치스러운 삶을 영위하는 것을 그만둘 것을 부드럽게 권유했다. 그는 더 이상은 자신도 예의 있게 받아줄 수 없다고 말한다. 즐.


엄마와 아빠는 말리는 시늉을 하며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다. 모진 말을 내뱉고 있지만 천성이 갈등과는 거리가 먼지라 내 하관은 호두까기 인형처럼 달달 떨리고 있었다.


정직하게 줄을 기다려 성 베드로 성당에 들어간다. 라틴어 한 줄 몰라도 성당 내부에서 느껴지는 신성한 분위기에 절로 작아진다.


숙소에 돌아왔고, 아빠는 내가 그렇게 억울해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며 카드회사에 전화를 걸어 이를 해결해보려 하지만 완벽한 사기는 아니므로 어렵다는 답변을 들었다. 돈보다도 괘씸함에서 나온 열심이다.


다음날, 인도인들을 쫓아다니며 영업(사기) 방해라도 할까 고민했으나 여행자는 떠나가야만 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