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객 노라의 고군분투 미국 교환학생 적응기 EP_7
Yellow Fever (동양 여성에 대한 판타지 혹은 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
대수롭게 않게 생각하던 단어였다.
내가 라틴계 남자에 더 눈이 가는 것처럼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상형'이나 '타입' 정도라고 너무 쉽게 생각을 해 버렸다. 실수였다.
이 일을 겪은 후, 나는 교환학생을 가는 후배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하곤 했다.
"Yellow fever를 조심하세요. 특히 큰 이유 없이 카카오톡을 가지고 있거나 아시아인 여자에게만 과한 친절을 베풀고 있다면, 그러면서도 딱히 아시아계 언어나 문화에 대해서 진지하게 배울 생각은 없어 보인다면 우선은 경계하는 게 좋을 겁니다"라고.
이 친구를 만나게 된 건 교환학생에 온 지 한 주가 채 지나지 않았던 한 여름, 홈파티에서였다.
에피소드 2에 썼듯, 당시 교환학생 버디로 활동하고 있었던 중국 친구 마틴이 아시아권 교환학생들을 당시 많이 초대해주었고 그곳에서 그의 친구였던 B를 만났다. 지난해 졸업을 하고 지금은 버팔로 시내에 있는 시티 뱅크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그는 처음 만나는 외국 친구에 대한 낯가림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지 방실방실 웃으며 나에게도 잘 대해주었다. 참 고마웠다.
그 뒤에도 종종 마틴네 집에 초대받으면 그를 볼 수 있었고, 그때마다 재미있게 어울려 놀았다. 몇 번은 이번엔 내가 좋아하는 술을 많이 샀다며 냉장고에 숨겨 놨으니 나만 먹으라는 소리도 했다. 그저 친한 친구를 위한 이벤트(?)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가 나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는 그의 친구들이 나에게 넌지시 물었을 때였다.
"노라, 혹시 B를 이성적으로 생각해본 적 있어?"
그때 나는
"응? 전혀. 나 남자 친구 있는 거 알잖아."라고 웃으며 넘기면서, 오해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게 선을 그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사실 넘은 선도 없었지만.
1년간의 미국 생활 동안 변함없이 잘 지낼 줄 알았던 (전) 남자 친구와의 연애가 온 지 2달 만에 빠르게 끝이 나고, 그 이후 그는 노골적으로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친구 결혼식에 가는데, 혹시 내 플러스 원이 되어줄 수 있어?"
여기서 플러스 원이란 데이트를 말한다. 다행히 프렌즈에 미쳐있을 때라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나름 진지하게 사귀고 있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만약 YES라고 했으면 이제 친구를 넘어서 이성적인 관계로 발전하는데 동의를 했다고 비칠 수도 있었다.
최선을 다해 고민하다가,
"미안해. 내가 그다음 주까지 내야 하는 아주 중요한 과제가 있는데 혼자 하는 게 아니라서. 그 친구한테 축하한다고 전해줘. 나중에 애들끼리 다 모여서 술이나 마시자. 잘 다녀와."라고 말을 했다. 그는 결혼식 당일 아침까지 나에게 혹시 시간이 되는지 물어봤다. 의지하나는 인정한다.
이후 큰 말이 없길래 다시 친구 사이로 돌아간 줄만 알았고, 몇 명 친구들과 함께 추수감사절에 그의 집에 초대를 받게 되었다. 일이 시작된 것은 추수감사절 전날. 잘 모르는 주제에 대한 영문기사에 대학시절 꽤 글을 잘 썼다는 그에게 피드백을 부탁하면서 처음으로 단 둘이 학교 근처 스타벅스에서 만난 날이었다. 한 2시간 정도 피드백을 받고 이제 학교로 돌아가려는데, 그가 갑자기 얼굴색이 굳어지면서 내 팔목을 잡았다.
"나 사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설마 아니길 아니길 아녔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이대로 친구 하나를 잃고 싶지 않았다)
"뭔데? 너 무슨 일 있어? 직장에서 안 좋은 일 있었어?"라고 물으며 말을 바꿔보려고 노력했다.
"내가 너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한 거 알고 있어? 네가 결혼식 데이트 거절할 때 너무 슬펐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친구 말고 남자로 말이야."
오. 마이. 갓.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이런 오래된 발라드 가사를 미국에 와서 듣다니. 막상 고백을 받자 머리가 복잡해지면서 속이 매쓰꺼워졌다. 그래도 미국에 처음 와서 많은 걸 의지했던 친구인데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말머리를 배배 돌리고 나름 비유법을 쓰려고 노력했으나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영알 못의 입에서는 그런 고급진 문장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머리로 몇 번이나 생각에 생각을 하다 "B, 나도 네가 너무 좋아. 그렇지만, 나는 지금까지 너를 남자로 본 적이 없어. 나를 좋아해 줘서 너무 고마워. 너 되게 용기 있다. 너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라고 말을 했고 그는 너무 갑작스럽게 말했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그 모습이 꽤 귀여워 보였다.
고백을 듣고 나서 함께 그의 집에 가는 길. 느낌이 참 이상했다.
어제까지 친구였던 애였는데 고백 하나로 3시간에 한 번씩 가끔 남자로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얘랑 만나면 어떤 일이 생길까라고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술기운이라 그런지 평소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그의 얼굴이 어쩐지 좀 괜찮아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어렵게 자신의 마음을 말해준 그 마음이 고마워 열심히 그가 '친구'아닌 '남자'로 내 옆에 있어야 할 이유를 밤이 새도록 찾고 또 찾았는데, 나의 이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 나는 술버릇이 있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다) 술을 마시면 우선 잠이 들었다가 새벽 5-5:30 사이에 반드시 일어나서 세수를 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다시 침대로 가서 멍하니 누워 있는다. 물론, 이때 온전히 내 뇌가 깬 것은 아니다. 이때 일어나서 급히 과제로 제출한 기사에는 부제목이 없거나 헤드라인이 반토막 되는 일도 있었으니까. 이 날도 5:30분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누워 있었다.
'끼_이익'
방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B와 당시 친하게 지냈던 한국 동생 Y가 들어왔다.
"B, 조용히 해. 그리고 빨리 가서 자는 척해."
여자의 촉은 정말 뛰어나다고 했다.
하지만 이 날만큼은 내 촉이 맞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의심하지 말자. 뭐, 잠이 안 와서 밖에서 얘기하고 들어왔을 수도 있지.'
학교로 돌아와 또다시 함께 술을 마시다 둘이 남게 되었을 때 그는 또 나에게 물었다.
"내가 한 말에 대해 생각해봤어? 난 네가 참 좋아."
Y와 아무 일이 없었던 걸까. 그냥 내 의심인가.
하지만 어쩐지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No라고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난, 잘 모르겠어. 겨우 이틀 지났잖아. 여전히 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건 변함없어."
이 말을 끝으로 모두 해산했고, 나도 씻고 자려고 하는데 그가 두고 간 지갑과 보드게임용 카드가 보였다.
마틴과 B는 Y 방에서 잔다고 하여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그녀의 방이 있는 2층으로 내려갔다.
추수감사절이라 모두 본가로 내려가 적막이 가득했던 기숙사에서 나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리는 그들의 신음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지갑도 떨어뜨리고 내 손은 덜덜 떨고 있었다.
그렇게도 믿고 싶지 않았던 촉이 현실화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YES라고 답하지 않은 나 자신을 격하게 칭찬해주고 싶은 순간이었다. 여기서 끝이 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럼 축하는 못해줘도 '미친놈, 잘해봐라' 하고 넘어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다음 날 나는 또 다른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그날 그 일을 끝내고 또 나와 같은 층에 사는 함께 어울리던 또 다른 한국 친구의 방에 들어가 "나 오늘 너랑 자고 싶은데, 여기 있어도 되지?" 라며 자고 있는 애의 이불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때 친구는 다음날 아침 일찍 온다는 룸메이트를 위해 문을 잠가 놓고 있지 않았었는데 그걸 알았던 건지 몰래 들어와 문을 잠그더라는 것이었다.
친구는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미친 거 아니냐. 나 남자 친구 있어. 소리 지를 거야."라고 말했고, 그는 "아, 난 네가 나랑 같은 마음인 줄 알았지. 다음에는 튕기지 마. 안 귀여워" 라며 다시 Y 방으로 갔다는 것.
다음 날, 너무 화가 나서 뭐라고 메시지를 보내야 할까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찔렸던지 그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미안한데, 어차피 넌 기다려도 나한테 안 올 거였잖아. 내가 좀 다른 애들이랑 노는데 그게 뭐 잘못됐니? 네가 YES라고 바로 말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이런 미친 새끼."
너무 어이가 없으면 웃음이 나온다고 했던가. 참 많이도 웃었다.
이렇게 나는 친구를 둘이나 잃었다. B와 B가 한 모든 일을 듣고도 그를 믿고 싶어 졌다는 Y까지.
지금 생각해도 참 끔찍한 일이지만, 이로 인해 '모든 호의가 공짜는 아니다.'라는 교훈과 함께, 'CHICK IS ALWAYS BEFORE DICK(여자 친구가 남자보다 우선)'라는 미국애들의 말을 가슴속에 넣고 산다.
이렇게 우리끼리만 아는 큰 소동이 벌어지고, 난 그가 한 말들과 행동들을 곱씹어 보기 시작했다
카카오톡
유독 베트남, 한국인 교환학생들이 있는 파티에만 와서 엄청난 호의를 베푼다
그런데 딱히 한국 역사나 문화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
아시아계 언어를 1도 구사하지 못한다.
젠장. 설마.
술자리에서 그가 한 말이 있다.
"아시아 여자들은 어떤 남자 좋아해? 인종 말이야. 백인이 그래도 낫지?"
Y가 말한다. "그렇지, 한국에는 아직도 백인 우월주의가 있는 것 같아. 하얗고 금발 머리를 더 선호하는 여자들이 많아. 이태원 가보면 알아."
이때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뭐야. 너네 1900년대에 사니?"라고 말하며 백인 우월주의가 있다는 건 부정하지 못했었다. 여전히 한국 사회에도 인종으로 그 사람의 학력과 배경을 지레짐작하며 차별을 하곤 하니까. 백인이면 한국에 외국인 노동자로 왔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흑인이면 한국에 교수나 자문 위원으로 왔다고 잘 생각하지 못하니까. 인종 = 계층은 아니지만 시선은 여전히 그렇다.
1년 후,
그가 한국에 왔다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기까지 와서 나와 친구들에게 한 것처럼 이름 모를 피해자들을 남기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는 것 그리고 또 그 못돼 먹은 yellow fever 때문에 자신을 믿고, 미국에 남아준 Y를 배신했다는 것도.
YELLOW FEVER는 절대 이상형이나 타입 같은 게 아니다. 그러니 다가오는 호의에 감사하되, 한 번쯤은 의심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내 몸은 내가 지켜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