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깟 성적 때문에 그건 내가 절대 할 수 없는 분야라고 생각했다.
대학교에 와서 적성 검사를 받은 적이 있다. 선호도와는 상관없는 꽤 정교하고 과학적인 검사라서 더 결과가 기다려졌다. 1시간이 넘는 검사를 하고, 하루 뒤에 검사 결과를 받아볼 수 있었다.
호기심에 가득 찬 채 받은 결과지의 마지막 장에는 추천 학과와 직업이 나와 있었다.
<OOO님에게 어울리는 계열은 다음과 같습니다>
1순위: 공대, IT계열
2순위: 의학, 보건 계열
3순위: 수학, 통계 계열
4순위: 언어 계열
5순위: 예술 계열
6순위: 사회과학계열
7순위: 교육 계열
엥?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받았을 때의 당혹스러움이란.
'몇 년이 넘게 역사 선생님을 꿈꿨지만 좌절되어 지금은 언론홍보학과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쌩뚱맞에 이게 무슨 결 과람.'
아니 무엇보다 중학교 때부터 수학 꼴찌 그룹으로 유명했고, 기계치였다. 그리고 컴퓨터의 컴자도 모르는,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머리가 하얘지는 나였다.
'비싼 값을 못하네. 에이.'
허탈하게 웃으면서 기억에서 지웠다.
그리고 얼마 전 방을 정리하다 다시 이 결과지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때와는 다른 감정이 들었다.
끊임없이 무기력해지기 싫어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들에 도전하기 시작한 지난 몇 달, 도장깨기 식으로 몇 가지 자격증을 따고 마지막 도전으로 컴활 1급을 응시했다.
사실 처음 시작할 때는 '그냥 경험 삼아 해보자' 라는 마음이 컸다. 나는 어차피 컴맹이니까. 떨어질 건데 그 과정에서도 뭔가 배우는 게 있겠지.
하지만, 그런 나의 첫 마음과 달리 컴퓨터 공부는 어려웠지만 재밌기도 했다.
'나, 어쩌면 이런 거 좋아하는 거 아니야? 왜 더 일찍 안 한 거야?'라는 궁금증이 들었고 이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내가 왜 수학을 그만뒀을까. 내가 왜 컴퓨터는 재미없는 거라고 생각했을까.
왜 나는 못한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왜 이 분야로 전공을 선택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
답이 나왔다.
‘성적’
나는 예전부터 이해가 가지 않으면 암기를 하지 못했다. 반면, 한번 이해가 가면 그 누구보다 빠르게 머릿속에 넣었다. 고3 때 동아시아를 공부하면서 300개가 넘는 년도를 암기한 것도 그래서 가능했다.
너무나 빨리 진행되는 중학교 수학 시간에서 나는 이해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차 함수의 응용을 처음 배웠을 때였나.
왜 그렇게 풀까요?라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에 선생님은 “그럼, 너는 어떻게 배웠는데?” 네가 푸는 방식을 알려줘.”라고 되물으셨다.
나 오늘 처음 배우는데…
솔직하게 답했다.
“사실 풀 줄 모르는데요. 그냥 이해가 안 가서...”
선생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답하셨다. “수학은 암기야. 풀이가 이해가 안 가면 그냥 외워야지.”
.
.
불행하게도 컴퓨터 수업 시간도 그랬다.
수업을 30분 하고 나머지 15분은 배운 대로 따라 하는 거였는데, 이해가 가지 않았다.
10분 정도를 하나하나 되짚어 본 후, 시작을 하려고 하면 항상 컴퓨터 실에는 나 혼자만 남아 있었다. 친구들은 그런 날 보고 말했다. “넌 컴퓨터는 아닌가 보다. 완전 문과 체질”
.
.
.
다행히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난 포기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묵묵히 풀이 과정을 암기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무사히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정적분이 참 예쁘게 생겼길래 관심이 갔다. 선생님께 “정적분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어느 분야에 이용할 수 있어요?왜 계산은 위에부터 할까요?" 라고 물었다.
선생님은 대답했다. “그런 건 대학 가서 전공으로 선택하고 나서 공부해. 지금은 이 문제를 푸는데 집중해야지. 시간 없다. 수능 때도 그럴 거야?"
그다음부터 나는 수학책을 덮었다. 자연스럽게 수업을 따라가지 못했고, 또 자연스럽게 '못하는 학생' 이 되었다.
문이과를 선택하는 시간. 나에게 가장 어려운 시간이었다.
사회와 과학이 다 좋은데 왜 하나만 선택을 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살아가는 데 있어 둘 다 필수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과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로 지금 문이과가 사라진 것이 너무 잘 되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내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문과를 썼지만, 방학 내내 이과 반에 가서 수업을 들었고
내가 사회를 좋아하는 것만큼 얼마나 생물과 화학에 흥미가 있는지를 깨달았다.
결국, 방학 마지막 날. 교무실에 가서 말씀을 드렸다.
“안돼, 너 때문에 학교 시스템 엉망 된다. 그니까 잘 선택하지 그랬어.”
17살의 아이에게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시간은 겨우 1주일이었다.
3일을 교무실을 찾아가 애원하고 울어도 봤지만, 선생님은 단호했다.
결국 담임 선생님이 나를 데리러 왔고, 그것이 선생님과의 첫 개별 상담이었다.
길 줄 알았던 그 상담은 아주 짧았고, 목표는 단순했다.
그 목표 달성을 위해 선생님은 나의 1학년 성적을 오픈했다.
“국어 2등급, 사회는 네가 계속 1등이네. 영어 1등급, 과학 3등급, 수학 5등급?”
“너 인생 어쩌려고 해. 대학 가고 싶은 거 맞아? 이과 가면 너는 용의 꼬리밖에 못 되는 거야. 이성적으로 생각해라.”
나는 졌다.
나는 내 점수에 졌고, 나의 열등감에 졌다.
컴활 실기를 준비하며 프로시저 문제에서 간단한 코딩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이 너무 재밌다. 열심히 뭔가를 입력해서 컴퓨터가 알아듣고 한 번에 결과가 나오는 게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다.
그래서 다시 생각했다.
'컴퓨터는 절대 못한다고 생각했던 거,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던 게 어쩌면 여전히 나의 과거에 사로잡혀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하고.
이제는 하나씩 그 과거의 평가에서 나올 거다.
그렇게 해서 놓친 게 한두 개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에 너무 속상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제시의 한 마디가 생각난다
“네가 뭔데 날 판단해?”
겨우 숫자 주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