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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다지 May 16. 2021

Ep.4 왜 사서 고생을 해야 하나요?

인턴 생활 3개월 차, 첫 평가의 시간과 마주했다.

로봇 회사에서 마케팅 인턴으로 일을 한 지 2개월이 지나가는 시점이었다. 여전히 나와 엄청난 경력 차이가 나는 사수님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다고 로비로 부를 때면 '아, 나 일 못해서 잘리겠구나.' 싶었다. (사실, 이 날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챙겨주시려고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날은 나에게 과제를 발표하신 날이었다. 


스타트업의 특성상 개인의 성과가 가장 중요시되기 때문에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렇게나 빨리 오게 될 줄 몰랐다. 사실 어쩌면 안 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엔지니어 인턴들은 입사를 하면 A.B.C 미션을 주고 각자 잘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해 최소 5개월 최대 7개월을 주고 마지막 주에 발표를 하게 되는데 나는 겨우 2개월 차였기 때문이다. 인사팀 매니저님은 이 과제 발표가 추후 근무 연장 혹은 정규직 전환에 큰 영향이 없을 거니 마음 편히 준비하라고 했지만 내 마음은 이미 쓰나미가 온 듯 울렁거렸다. 


이 주가 넘게 주제 조차 정하고 있지 못하자 사수님이 결국 과제를 던져 주셨다. "경쟁사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 브랜드만이 할 수 있는 캠페인은 뭐가 있을지 생각해 보세요. 다지님 포트폴리오를 보니 아주 잘할 것 같아서요" 한 편으로는 과제가 정해졌다는 것에 속이 시원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큰 부담감이 찾아왔다. 공모전이나 팀플에서 좋은 성과를 냈을 때는 1. 관심이 있는 주제 (당시에는 화장품, 주류 및 식품) 2. 잘 아는 타깃 (주로 내가 속한 밀레니얼에서 Gen-X) 3. 마음에 맞는 팀원들 4. 넉넉한 시간 5. 원하면 언제든지 받을 수 있는 디테일한 피드백 이 모든 항목이 전제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직은 어색한 로봇이라는 소재를 부모님 말고는 한 번도 대화를 나눠 본 적 없는 50대 이상의 식당 사장님들을 대상으로 팀원도 없이 짧은 시간 내에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2주. 퇴근 후에도 정신없이 자료조사를 하고 (처음에는 어느 곳에서 조사를 해야 할지도 몰라 사수님이 만들어 놓았던 ppt를 참고했다) 주말에는 PPT 구성을 해서 피드백을 받았다. 아직 완벽하게 만들지 못한 PPT에 벌벌 떨면서 피드백을 받았는데 "이래서 제가 다지님을 뽑은 거예요.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확실히 드러나면서도 재밌어요."라는 말에 하루 종일 신바람이 났다. 창의성은 모방에서 나온다더니 졸업하고도 꾸준히 광고 기획서를 보았던 것이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덧붙이신 말, "짧은 기간 일을 했고, 개발자 이외의 팀에서 뽑은 첫 인턴이라 굳이 이 발표를 안 해도 되었지만, 회사에 대해 스스로 공부하고 인정받을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해야 하나', '이건 불공평해'라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이 참으로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리고 사수님의 말씀대로 처음으로 공식적인 자리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3개월의 짧은 인턴. 이제야 조금씩 회사를 알아간다고 생각했던 이때.

발표 직후 나는 2개월 연장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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