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국에 3184km 스페인을 횡단할 수 있었던 이유.
2022년 1월 1일, 새해를 맞이해 남자 친구와 함께 고향인 청주를 방문했다. 생전 처음 사랑에 잔뜩 빠진 눈을 하고서는 남자 친구를 소개하는 딸을 엄마는 참으로도 신기해했다. 호르헤는 아는 한국어를 총동원해 최선을 다해 엄마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것 같았고 그 모습이 너무나도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서울에 비해 너무나도 작고 그리 볼 것 없는 이 도시를 그는 참 맘에 들어했고, 20년 지기 친구와도 정말 잘 어울리는 모습에 얼굴에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날, 스페인으로 가는 티켓을 끊었다. 사실 스페인에 가기로 결정한 것은 12월 말이었다. 호르헤 부모님은 아들이 교환학생으로 있는 한국에 한 번 오고 싶어 하셨지만 긴 자가격리와 추운 날씨 때문에 포기하실 수 없었고, 호르헤 역시도 티는 안 내지만 부모님과 친구들을 많이 그리워하는 듯했다.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온라인 수업 때문에 학교에서 친구들을 사귀기 힘든 환경이었고, 사실 22년간 부모님과 함께 지내다 처음으로 외국에서 혼자 살아가는 것은 나도 경험해 보았기에 잘 알고 있었다.
3개월간의 국비지원 마케팅 프로그램이 끝나고 동기들은 하나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고, 내 나이 28살, 인턴 8개월 동안 얼마 안 되는 월급의 반을 저축한 것을 제외하고는 가진 것이 없는 나는 또다시 극심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런 나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에 호르헤도 기대 없이 나에게 물었다. "우리 집에 가볼래? 근데, no pressure이야 알지?"
정말 왜 인지 아직까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나는 5분 만에 "Yes"를 외쳤다. 너무나도 불안한 내 삶이었지만 3주간의 여행 그리고 일주일간의 격리 기간이 나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으리란 것을 호주에서의 삶을 조금은 배웠던 것 같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직접 보고 느끼고 만져보고 싶었다. 20대의 많은 시간을 여행과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에 투자하면서 나는 활력을 얻었고,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펜데믹이 터진 이후, 호주에서 돌아와 2년간 한국에서 지내면서 나름대로 애를 썼으나 사회의 시선에 맞는 나로 가공시킬 뿐 정작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잊고, 자존감도 떨어질 때로 떨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무기력했다.
출발 2주 전, 남자 친구의 집이 있는 스페인 바르셀로나행 비행기 티켓을 끊고 함께 어디를 갈 것인지 여행 계획을 짜면서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른다. 또, 책장 구석에 박아 두었던 스페인어 회화 책을 꺼내 하루에 4시간씩 연습을 했다 (막상 가서는 크게 도움이 안 됐지만 말이다)
스페인에 3주간 다녀오겠다는 나의 말에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반반이었다. "부럽다 잘 다녀와, 내 몫까지 잘 놀아줘." 혹은 "확진자 많은 유럽을 가겠다고? 게다가 너 취준생이잖아."
예전 같았으면 후자의 말을 더 신경 썼을 것이다. 취준생이고, 이 여행을 마치면 월세조차 걱정해야 하는 텅장 보유자가 되어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2022년 올해는 걱정만 하면서 살고 싶지 않았다. "사회에게 잘 보이기 위한 사람이 되기 위한 계획 대신, 나의 행복한 20대의 삶을 위한 기획"을 하겠다는 올해의 다짐을 지키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스페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교차가 큰 겨울의 스페인에서, 나는 독감으로 죽다 살아나기도 했고, 평소에 음식에 간을 거의 하지 않는 나에게 음식은 고난의 연속이었으며 신생아 수준인 나의 스페인어는 호르헤의 가족과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 여행을 떠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스페인이라는 나라가 더 궁금해졌다. 어쩌면 살고 싶을 정도로. 3184km의 대장정을 통해 느꼈던 다양한 도시들의 분위기, 그리고 잠깐이었지만 강하게 다가왔던 스페인만의 문화와 사회 시스템에 대해서 몇 개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공유해보고자 한다.
어디에서 살지 모르겠는, 나같이 방황하는 청춘에게 조금은 도움이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