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 대신 웃음과 술만 있는 세상 쿨한 Spainsh 부모님과의 첫 만남
새해 첫날, 남자 친구와 함께 부모님 댁이 있는 청주에 놀러 가면서 부모님께 전화를 했었다. "아빠, 이번에 남자 친구랑 같이 청주에 갈 건데 같이 밥 먹을래요?" 아빠는 내게 결혼할 사이냐고 물었다. 나는 "아빠, 15살 때부터 말했잖아. 내 인생에 결혼은 없다고. 하지만 같이 살고 싶고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야... 그래서..." 남자 친구가 생기면 언제든 데려오라던 아빠는 어디에 있는지, 결혼은 여자를 옥죄는 잘못된 시스템이니 하지 않겠다는 나의 가치관을 존중해주던 아빠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빠는 불같이 화를 내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중에 동생에게 들은 얘기로는 아빠는 내가 남자 친구가 생길지 몰랐는데, 그 남자 친구가 외국인에 결혼할 사이가 아니라고 하자 실망을 했다고 한다. 겉으로는 나를 응원했지만 아빠도 어쩔 수 없는 기성세대이다 보니 마음속으로 내심 기대를 했던 것 같다. 미안해 아빠. 아빠의 마음을 이해는 해도 동의를 해 줄 수도, 따라 줄 수도 없어. 그렇게 그날 나는 집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친구 부부네 집에서 잠을 청했다.
그리고 스페인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해서 처음 호르헤의 엄마와 만난 날. 영상 통화로는 몇 번 인사를 했지만 실제로는 처음이라 엄청나게 긴장을 했다. 어쩌면 아빠처럼 벽을 세우시지는 않을까, 결혼에 대해 묻지는 않으실까 걱정했다. 20시간의 비행 후 지쳐있던 몸의 세포들이 하나하나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만난 지 1분도 되지 않아 유교 나라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의 쓸데없는 걱정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보자마자 아들보다 더 반가워하시며 뽀뽀로 인사를 해 주시고 꽉 안아주시는 그녀의 따뜻함에 긴장이 풀렸고, 우리가 온다며 호르헤의 방을 예쁘게 꾸며주신 것을 보고 웃음이 났다.
한국에서는 결혼을 한 사이가 아니라면 보통 같은 집에 있어도 같은 방에서 자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데, 이곳에서는 같이 자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좁은 비행기 안에서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인지 우리는 6시간을 곯아떨어졌다. 일어나 보니 호르헤의 아빠, 조르디가 와 계셨고, 호르헤의 엄마인 마리아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페인 음식, 해산물 빠에야와 또르띠야 그리고 질 좋은 하몽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스페인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몇 개의 단어와 문장만 알아듣는 정도라 식사 자리가 걱정이 되었는데, 그들은 이유 없이 아들의 여자 친구라는 것만으로 나를 환영해주었고, 나는 정말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대접받았다. 언어도 나의 국적도 그리고 우리가 사귄 기간도 그들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전국일주를 떠나기 전날, 마리아와 조르디는 여름휴가를 보낸다는 바르셀로나에서 1시간이 떨어진 근처 해변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해산물과 상그리아에 환장하는 나를 위해 온갖 해산물과 핀쵸(바케트 위에 한 입 거리의 재료를 올려 파는 음식 - 주로 해산물이 주 재료다)를 주문해 주셨다. 좋아하는 남자 친구의 부모님께 잘 보이고 싶었던 것인지, 긴장을 풀고 싶어서였는지 상그리아 까바와 다양한 와인 그리고 가게에 유일한 외국 손님이라면서 직원이 가져다준 무료 술까지 마시고는 필름이 끊겼다. 쇼핑몰 화장실 변기에 앉아 토를 하는 나를 마리아는 묵묵히 기다려주었고, 창피해하지 말라며 꼭 안아주었다.
떠나기 전, 마리아는 자기와 커플 템이라면서 팔찌를 선물해 주었고 팔이 뚫린 스웨터가 예쁘다는 나의 한 마디를 기억해 주시고는 똑같은 옷을 사 주셨다. 그리고 조르디는 한국에서는 구하기 어려울 거라면서 하트가 가득한 내 맘에 꼭 드는 타월을 선물해 주셨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이지만, 그리고 제대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 아들의 여자 친구이지만 호르헤를 통해 최선을 다해 한국의 문화에 대해서 알려고 하시는 모습이 감사했고, 감동이었다.
처음 가보는 남자 친구의 집에서, 그것도 스페인에서 부모님과 일주일을 넘게 있으면서 그 어떤 압박도 긴장감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내 집처럼 아주 편안했다. 공항에서 인사를 하며 사랑한다고, 호르헤를 잘 부탁한다고 꼭 안아주시는 마리아의 품에서 나는 간신히 눈물을 참았다.
여름이 되면 꼭 다시 놀러 오라고, 호르헤 없이도 언제든지 와도 된다며 이유 없이 나를 좋아해 주시는 분들에게 한국에 오면 꼭 제대로 대접하리라 마음먹었다. 스페인어를 포기하지 않고 연습해서 다음에는 더 많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감사합니다.
+ 참고로 스페인은 결혼을 하지 않고서도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으며, 파트너 제도가 잘 자리 잡혀 있다. 1-2가지를 빼놓고서는 결혼한 부부와 똑같은 복지 혜택을 누릴 수 있다. 호르헤의 부모님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나이, 결혼과 관련된 질문을 들을 수 없었다. 해변에서 식사를 마치고 다정히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모습, 웃는 모습이 참 예쁘지 않냐면서 마리아의 머리를 쓰다듬는 조르디의 모습에서 나는 결혼이라는 제도의 무의미함을 다시 확인했다. 제도에서 다 벗어나 나는 그냥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고 싶다.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서로에게 웃음을 주고 싶다. 호르헤와도 그렇게 지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