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객 노라의 고군분투 미국 교환학생 이야기 EP_5
글/사진 보통의 노라
정신없이 쏟아지는 과제를 해결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머리 위로 노오란 낙엽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벌써 가을이구나.'
1학년을 마치고 행정학과에서 언론홍보학과로 전과를 한 덕에 난 교환학생까지 와서도 전공 학점을 채우려 전전긍긍해야 했다. 그래도 이론 수업은 어느 정도 듣고 왔기에 이곳에서 1학년 필수 전공인 'Communication For Social Justice' 과목을 호기롭게 선택을 했다. 1학년 과목이라 하여 당연히 별거 아닐 줄 알았다.
아주 크나큰 착각이었지.
대머리가 꽤 잘 어울리는 열정 넘치는 교수님은 주 3일이나 되는 이 수업을 1분 1초도 낭비할 생각이 없으셨다. 그만큼 과제도 매우 빡셌다. 'Pop Quiz' 라 하여 예상치 못한 순간에 쪽지 시험을 봤으며 (항상 내가 예습을 안 해 왔을 때 일어나서 내 팝 퀴즈 성적은 100점 만점에 25점) 매주 목요일에 게시판에 짧은 에세이 과제를 내주고 일요일 자정까지 제출을 하는 것이 필수였다. 물론 두 번의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도 존재한다. 이 에세이 과제가 정말 지옥이었다. 그동안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져 이론 암기만 주구장창 해왔던 전형적인 한국 학생의 사고로는 한 글자도 쓸 수 없는 주제가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최근 1년 중 광고를 하나를 선택해, 미디어 문법 3개로 해석한 후, 왜 그런 해석을 했는지 본인만의 근거를 들어라(1000자)' 혹은 '미디어와 정치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최근까지의 대선 캠페인 광고를 분석하여 어떤 방법으로 어떤 메시지를 주고자 했는지 분석하여라(2000자)'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첫 전공 수업은 나의 주말을 송두리째 앗아갔고, 친구들은 주말에 유령처럼 도서관으로 사라지는 나의 모습에 익숙해져 갔다.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참 그 교수님께 감사하다. 처음으로 '페미니즘'에 대해 접했고, 모든 미디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던 내가 나름 분석적으로 글을 쓸 수 있게 되는 토대가 되었다. 또, 이 모든 것을 영어로 쓰다 보니 영어 실력도 정말 빠르게 향상되었다 (물론, 파파고와 구글 번역기의 도움이 컸다)
중간고사가 끝나자 이상한 풍경이 펼쳐졌다.
겨우 중간고사가 끝난 것인데 같은 반 친구들은 학기가 끝난 것 마냥 기뻐했다.
알고 보니 Canadian Thanksgivingday 가 있어서 핼러윈 전까지 약 일주일 간 방학이라는 거다.
"응? 여기 미국이잖아. 왜 캐나다 추수감사절을 너네가 챙겨?"
"국경선에 있어서 그래. 우리 학교에 캐나다 출신들도 많아. 장학금도 똑같이 주고. 아! 교수님도 캐나다에서 출근하시잖아."
'헐...'
알고 보니 열정 넘치시던 교수님도 주 3일 수업을 위해 캐나다에서 국경을 넘어오시는 거였다. 마치 같은 나라처럼 이동이 쉬웠다. 국경선은 그냥 톨게이트(?) 같았고. '같은 민족인데 떨어져 있는 한국과 북한보다 낫네'라는 생각을 하며 그저 휴일이 있다는 것에 너무 기뻤다. 다음 학기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2학기는 더 휴일이 많다. 봄방학, 이스터 방학(부활절)을 포함하여 얘네는 시험 2주~3주 전에 이미 수업은 끝나고 시험을 준비할 시간을 준다. 그리고 물론 '절대평가' 학교에 아예 나오지 않는 이상 C 이하로 받는 게 더 어렵다 (이건 다음 에피소드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다)
교환학생에 와서 처음으로 휴일이 생겼는데 뭘 할까 고민하던 중에 첫 주에 홈파티에서 알게 된 N이 자신의 집으로 나와 친구들을 초대했다. 갈 곳도 마땅치 않던 차에 흔쾌히 수락을 했고 장을 본 후 나이아가라에서 차로 1시간 30분 정도 떨어진 '로체스터' 지역으로 이동했다. 어딜 가나 친구가 운전을 해서 괜스레 미안했다.
캐나다 추수감사절은 할로윈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 짐을 풀고 로체스터 시내 쪽으로 가자 축제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코스튬을 입고 있었고, 술에 잔뜩 취한 듯 보였다. 우리는 1차로 펍에 가서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와 보드카 샷을 시켰다. 물론 집에서도 이미 한 병씩 마시고 온 상태. 밖에 나가면 술 값이 3-4배 이상 치솟는 미국에서는 클럽이나 펍에 가기 전에 집에서 반쯤 취한 상태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특히, 지갑이 얇은 학생들은 더. 이때 마셨던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는 여전히 내 인생 최고로 남아있다.
지금은 알콜 쓰레기로 전락하였으나, 23살의 나는 술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비는 어린 헐크였다. 술은 잘 못하는 언니들 몫까지 원샷을 해버리고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클럽에 도착. 코트에 바지를 입은 사람은 우리 밖에 없어서 살짝 민망했다. 딱 여기까지만 기억이 난다. 이후에 친구가 잭콕을 사서 왔는데 이미 취한 상태에서 술맛을 느끼지 못하고 마치 콜라만 있는 듯 쭉 들이켜 버려서 다음 기억은 없다. 돌아가면 싸대기를 아주 때려줄 거다.
다음날 아침, 푹신한 매트릭스에 몸을 기대 자서 그런지 숙취는 0.00001%도 없었다. 이때부터였나, 내가 매트릭스에 집착을 하게 됐던 것이.
친구 집 지하실에는 보드 게임이 잔뜩 있었다. 그리고 블랙잭을 위한 카지노 식 테이블도 있었다. 거기서 가족들이 옹기종이 모여 앉아 게임을 한다고 했고, 실제로 우리가 게임을 할 때도 친구 아버지께서 감독을 해 주셨다. 사실, 난 아빠와 쌓은 추억이 별로 없다. 우리 가족이 화목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가족을 이루는 것에 대한 로망 같은 건 없었다. 결혼은 여성이 희생해야 하는 가장 시대에 뒤쳐진 제도이며, 그 안에서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것은 전혀 행복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이 상황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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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는 버팔로 치킨을 시켜 먹었다. 그렇다. 내가 살았던 나이아가라 지역은 뉴욕주 버팔로시에 속해 있었고 전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버팔로 윙을 맛볼 수 있었다. 이때 평생 먹을 닭날개는 다 축적하고 온 것 같다. 버팔로 윙과 블루문 맥주의 조화는 과히 넘사벽이라 할 수 있다. 꼭 드셔 보시길.
죽을힘을 다해 중간고사를 보고 맛보는 휴일이라 좋았고, 처음으로 현지 친구 집을 방문해 '미국 가정'의 모습을 경험해 볼 수 있어서 더욱더 특별한 휴일이었다. 이렇게 나는 천천히 미국 생활에 적응을 하고 있었고, 한 계단씩 성장하고 있었다.
낙엽이 떨어지고, 눈이 내리기 시작한 10월이었지만
나는 결코 쓸쓸하지도, 춥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