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없이, 무엇보다 계획 없이 하고 싶은 거 미련 없이 다 해보자.
"뚜르르르르르릉"
"안녕하세요, OOOO 대표입니다. 채용 과정에서 오해가 생긴 것 같아 다시 연락드렸어요. 아직 저희 회사에 입사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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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졌다고 생각했었다. 거의 1시간 30분이 되는 기나긴 면접을 보면서 희망을 품었지만 타이밍이라는 것도 있는 거니까. 그래서, 떨어져도 내 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또 그놈의 컬처 핏 때문이겠지 (이걸로 지난 면접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었다). 나는 이 회사를 마지막으로 다른 면접에 가지 않았다. 제안이 와도 죄송하다고 정중히 말씀드렸고, 취업준비를 더 하는 대신 이태원에서 주 25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하면서 호주로 돌아갈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서빙 알바는 꽤나 괜찮았다. 첫날임에도 불구하고 손 발이 척척 맞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고, 귀찮아서 혹은 돈을 아낀다는 이상한 이유로 저녁을 대충 먹었던 내가 꽤나 근사한 태국 요리로 한 끼를 채울 수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일 잘하는 친구가 와서 너무 편하다."라는 소리가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었던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이상하게도 삼일째 되는 날부터 같은 일을 하는 게 지겨워졌다. 손님은 달라졌지만 내가 해야 하는 업무는 항상 정해져 있었다. 일할 때만큼은 머리 대신 몸을 쓰고 집에 가서는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하고 싶어서 선택한 일이었다. 돈을 목적으로 선택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의 결정에 행복하지 않았다. 일이 끝나면 녹초가 되어 공부 대신 퉁퉁 부은 다리를 마사지해주기 바빴고, 가끔 손님들 중 몇 명이 마케팅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 속으로 '아, 나라면 이렇게 했을 거 같은데.'라고 생각하며 아쉬워했다. 게다가 퉁퉁 부은 몸 상태를 보상할 만큼의 넉넉한 돈을 받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다시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두려움과 귀찮음을 다 덜어내고 진짜 내가 무엇을 해보고 싶은지 천천히 고민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왜 호주에서 돌아왔는지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호주에서 돌아와서 우울증도 시작되고 정말 몸과 마음이 다 힘들었는데 나는 그게 한국이 싫어서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내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아 돌아와야 했다는 것. 그리고 더 들어가 보면 계획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온 '실패자'라는 낙인이 무서웠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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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네, 입사하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 계획한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지금 내가 하고 싶으니까. 그리고 언젠가 다시 다른 나라에 살게 된다면 내가 그렇게 좋아하고 원하던 전공을 살려서 실무를 경험해 봤다고 말하고 싶어서. 이런 과정에서 많은 실패를 거쳐도 나는 나 자신을 더 이상 실패자가 아닌 꾸준한 성장을 일구는 자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생 한국에 남고 싶다는 건 아니다. 내가 이 직장에서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우고 최대한 할 수 있을 때까지 나를 증명한 다음 새로운 나라에서 다시 한번 도전을 해보고 싶다. 그리고 만약 같은 일을 하지 않게 되더라도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해 봤으니까.
입사를 2일 앞두고 있는 지금, 잘할 수 있을지 많이 걱정이 되지만 그러면서도 또 다른 도전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쁘다. 평소 익숙했던 브랜딩이 아닌 신입 그로스 마케터로 걷는 낯설고 새로운 길. 그 길의 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느낄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전 회사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잘할 수 있다'라고 '나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 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