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회사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혼나지 않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닌, 내 성장을 위해 일하고 싶다.

by 보통의 다지

지난주, 새로운 회사에 출근을 하기 전 기분을 내고 싶어 머리를 자르고 매직을 하고 있는데 전 회사의 세일즈 매니저분께서 연락이 왔다.


"노라 님, 저 어제부로 퇴사했어요. 시간 되면 이따 같이 커피나 한 잔 할까요?"


전 회사를 퇴사한 지 (정규직 전환에 실패하고 계약이 만료된 채 나온 지) 약 10개월이 되어가는 날이었기에 무슨 일일까 궁금하면서 아직까지 나를 기억해주시고 먼저 연락을 해 주시는 게 감사했다.


나보다 3개월 늦게 들어온 매니저님은 인턴인 내가 봐도 '불쌍하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수인) 본부장님에게 많이 혼나서 마음이 많이 쓰이는 분이었다. 하이네켄 영업팀에서 일을 하면서 인정도 받고, 자신만의 세일즈 전략을 많이 가지고 계신 분이었는데 운이 안 좋게 이 회사에 1명 있는 꼰대 상사를 만나서 정말 모질게 당하셨다. 일적인 것만 지적하면 그래도 버틸만했겠는데, 인신공격과 더불어 매니저님이 한 성과까지 모조리 뺏어가니 회사에 있던 1년 반 동안 많이 고생을 하신듯했다.


그래도 매니저님이 계시는 동안 시리즈 B투자까지 받은 덕에 연봉을 1000만 원이나 높여 좋은 회사로 이직을 하실 수 있었고 처음 만났을 때처럼 생기가 도는 얼굴을 보니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만큼 마음고생을 잔뜩 시켰던 회사에는 미련이 없었으나 항상 마음 한 구석에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나였다.


매니저님의 상사처럼 꼰대는 아니지만 나 역시도 회사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었다. 성장과 가능성이라는 키워드 대신 성과와 평가라는 압박이 나를 항상 쫓아다녔고, 일개 인턴 주제에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항우울제와 수면제 처방까지 받으면서 4개월을 버텼다. 참다 참다 업무에서 문제가 생기자 사수님과 이 매니저님께만 슬쩍 떨어놓은 적이 있다. 병원에도 가야 하니까. 안으로는 썩어 들어가면서 겉으로는 멀쩡한 척, 그 누구보다 괜찮은 척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던 내가 걱정이 많이 되셨던지 내가 퇴사를 한 이후에도 종종 잘 지내냐는 연락을 주셨고, 퇴사를 한 후 가장 먼저 연락을 해 오셨다.


자리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매니저님이 나에게 가장 먼저 건넨 말은 "이제는 노라 님이 자유로워졌으면 좋겠어요."였다. 내가 맡은 일 그 이상을 하려고 잠도 줄여가면서 최선을 다했으나 혼나기도 정말 많이 혼났고 2번이나 연장이 된 후에도 남들 다 되는 정규직 전환이 결국 되지 않았다는 것에 많이 자책을 했었다. 내 실력이 이것뿐이구나, 나는 마케터를 할 역량이 없는 게 아닐까...라는 고민과 함께, 이런 생각들은 면접을 가서도 많은 악영향을 끼쳤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마케터로서 최악의 상황에 있으면서도 나는 항상 최선을 다했고, 항상 내가 목표한 일을 다 끝내고 집에 갔었다. 어제보다 오늘 더 나은 삶을 살자라는 내 신념도 충족했었고.


문제는 상황이었다. 너무 바빠서 나를 잘 챙겨주시지 못했던 워커홀릭 사수님... 그리고 질문의 기회를 박탈하고 완벽을 요구하며 개발자만 우대했던 회사. 매니저님은 그 누가 왔어도 나보다 잘하지 못했을 거라고 다독여주었다.


사실 퇴사를 하고 아주 오래 지났지만 그때 생긴 우울증과 불안장애로 여전히 고통을 받고 있고, 이번 주부터 새로운 일을 시작했지만 지난 회사에서 겪은 트라우마가 아직도 내 삶에 녹아져 있는 게 느껴진다. 모르는 것이 있어도 혼날까 봐 질문을 머뭇거리게 되는 것, 같은 팀인데도 남들보다 내 성과가 떨어지면 어쩌지 걱정하는 것. 신입으로 일한 지 겨우 4일째 되었는데도 말이다.


그래도 매니저님을 만나 이런 이야기를 들은 덕분에 점점 전 회사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있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꾸준히 나를 믿다 보면 진정 자유를 얻게 되지 않을까.


정신과 상담, 우울증, 극심한 불안장애 그리고 조울증까지.

어쩌면 나는 병원이 아니라 '괜찮다, 언제나 잘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 없다. 열심히 하는 거 알고 있으니까'라는 회사 상사의 위로가 필요했던 것 같다.


이제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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