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안정감이냐 새로운 시작이냐 그것이 고민될 때.
지난주 금요일을 마지막으로 6개월을 다니던 회사를 퇴사했다. 그리고 그 6개월은 짧지만 꽤나 밀도 있는 시간들이었다. 로봇회사의 마케팅 인턴으로 8개월을 일하면서도 마케팅의 '마'자도 모르고 개발자 뒤치다꺼리에 질렸던 나에게 이곳에서의 일은 어렵지만 보람찼고, 많은 자신감도 불어넣어 주었다.
수포자, 컴맹이라는 소리를 듣던 내가 절대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한 데이터 기반 그로스 해킹이라는 것을 하고 있다는 것이 매번 신기했고, 성공하고 싶어 하는 작은 회사들이 성장하는데 무언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컨설팅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게 보람찼다. 그리고 전 회사와 달리 거의 완벽에 가까운 수평구조를 자랑하는 것도 좋았다. 10년 차 사수와 단 둘이 일하며 제대로 효율을 내지 못했던 전 회사와 달리, 팀장의 역할을 하는 PM에게도 자유롭게 내 의견을 말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하는 게 좋았다.
그래서, 덜컥 인생에 딱 1번만 들 수 있다는 청년 내일 채움 공제를 들어버렸고 등록한 지 채 3달도 되지 않아 퇴사를 고민하게 되면서 1200만 원을 포기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야 할게 된 사실인데, 시작 후 1달 내에 취소를 하면 다시 지원을 할 수 있단다... 아까워)
300만 원을 넣어서 2년 후에 1200만 원 + 이자를 받을 수 있다는 건 대한민국 청년으로서 정말 엄청난 혜택이었다. 안 그래도 물가는 비싸지고, 월급은 오르지 않는 이 시기에 게다가 결혼식 준비까지 해야 하는 지금 정말로 매력적인 프로그램이었고. 나의 계획은 2년간 이 돈을 열심히 모아 월급의 50% *2년 + 청년희망적금 *2년 + 보증금 3,000만 원과 함께 스페인에 가서 1년간 석사를 하며 천천히 일자리를 알아볼 계획이었는데, 항상 그랬듯 나는 없는 처지에도 돈을 포기하고 마음이 끌리는 곳으로 몸을 던지기로 했다.
간단히 이유를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1) 현재 있는 회사에서는 대부분 Pre-A전의 회사들만 맡게 되다 보니 내가 하고 싶던 '실험'뿐 아니라, 상세 페이지 기획이나 촬영 제안서 등등까지 맡게 되었는데 콘텐츠를 요청할 때 열정적이지 않던 적이 많았다. 게다가 파트너가 아닌 우리를 '을'처럼 대할 때가 종종 있어 화가 났다.
2) 그리고, 그 클라이언트가 대체로 마케팅에 대해 무지한 경우가 많아 열심히 기획을 해서 넘겨도 아무 이유 없이 진행 안 되는 경우가 많았고, 커머스만 한정적으로 다루다 보니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지루해졌다.
3) 마지막으로, 대체로 일하는 분위기와 동료들은 너무 좋았으나, 인사팀이 없는 관계로 분위기가 무언가 어수선했다. 일이 끝나도 동아리처럼 회사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많았고, 10시가 넘어 지각하는 사람들이 반을 넘었다. 또, 공부를 강요하면서도 야근이 당연시되는 분위기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유연하게 시차를 쓸 수는 있었지만, 항상 야근을 함에도 중간에 30분 정도 병원을 다녀오거나 생리통이 있을 때 재택을 하지 못한다는 것도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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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가장 친한 친구이자 역시 마케터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H가 함께 얘기를 해 보는 것이 좋겠다며 전화를 했다. 정부지원 프로그램에서 알게 되어 친하게 지내던 언니가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고 했고, 과제나 면접까지 마쳤는데도 입사가 고민된다는 나의 말에 그는 말했다.
"내일 배움 공제 때문에 그래? 그거 나는 2개월 앞두고 그만뒀어."
"왜?"
"내 시간과 내 젊음이 그 돈보다 더 중요하니까."
"..."
말이 없는 나에게 그는 이해하기 쉽게 말해주었다.
"그 프로그램의 전제는 네가 회사에서 성장을 할 수 있고, 회사와의 핏이 잘 맞는다는 하에 좋은 거지, 그게 너의 발목을 잡으면 안 되는 거야. 그리고, 1200만 원? 그거 지금은 커 보이지만 열심히 하면 금방 올릴 수 있는 돈이기도 해."
이번 이직에서 그 이상을 올렸다고 말하며 그는 우리는 항상 열심히 살아왔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할 수 있다며 돈에 쫄지 말고, 인생 전체를 보라고 조언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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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 날, 며칠간 고민하던 결정을 내렸고 덜덜 떨며 대표님께 퇴사를 말씀드렸다. 왜 우리 회사가 아니라 그 회사에서 일을 하고 싶냐는 질문과 함께 내일 배움 공제가 날아갈 텐데 아깝지 않냐는 대표님의 말에, 나는 친구에게서 들었던 말을 토대로 답했다.
"너무 큰돈이고, 아까운 건 사실이나 그 돈을 포기하는 대신 더 하고 싶은 걸 하고 싶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음... 내가 붙잡아도 안 잡힐 거죠?"
"네"
"용감하네요. 여기서 배운 거 잊지 말고, 거기서도 잘할 거니까 뭐. 응원할게요. "
"네 대표님 감사했어요. 조금 오래 걸릴 테지만 정상에서 봬요 (웃음 웃음)"
겨우 6개월 차 주니어의 패기에 대표님은 어이없는 웃음을 던지며, 입사하게 되어도 자주 놀러 오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제안을 받고 이직 고민, 포트폴리오 업데이트, 면접, 과제 그리고 퇴사를 말하기까지 약 2개월. 회사에서 가장 큰 프로젝트 PA로, 3개월 차부터는 회사에서 가장 까다로운 프로젝트 PM을 맡으면서 많이 깨지고 많이 울었던 6개월은 쉽게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그만큼 빨리 익숙해졌던 이곳에서의 안정감과, 그 안정감을 느끼면서 버티다 보면 얻을 수 있었던 1200만 원을 포기하고 선택한 지금의 일은 더 소중하게 느끼면서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컨설팅 회사의 그로스 해커에서 이제는 블랜딩 티 브랜드의 인하우스 브랜딩 마케터로 나는 한번 더 성장할 기회를 얻었다. 전 회사에서 간절하게 원했던 가이드를 줄 수 있는 6년 차 이상의 선배님들과 지난해 만나 항상 나의 롤모델이었던 언니와 함께 더 빨리, 더 깊이, 더 넓게 배울 수 있도록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미래의 내가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도록, 미래의 나의 아이에게 선택을 할 때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해줄 수 있는 엄마가 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무엇보다 지금 나 자신이 더 행복할 수 있도록.
** 그동안 무슨 이유인지 글이 잘 써지지 않았습니다. 한 문장을 끝마치는 데 너무 힘들더라고요. 2달 만에 쓰는 글이라 두서없어 보일 수 있는 점 양해 부탁드리며, 앞으로는 바쁘더라도 부지런히 글을 쓰는 습관을 만드려고 합니다. 어렵다고 바쁘다고 안 쓰다 보니 더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글도 습관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