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4년 차쯤 이사를 하게 되었다. 집은 넓었지만 굉장히 오래된 그 빌라는 고칠 곳이 많았다. 다들 전세라면 그냥 대충 살고 나오니 안 고친다고 하지만 아이 셋이랑 살게 될 집을 그렇게 살기에는 내가 너무 젊었다.
그때 우리는 LH에서 지원해 주는 '신혼부부전세임대'라는 제도를 활용하고 있었는데 1회의 도배장판 기회가 있었기에 도배장판은 무료로 하고 나머지 것들은 셀프로 진행하기로 하였다.
LH에서 지원금이 나오고 우리 다음에 이사오 실 분들도 시간이 좀 있다고 하셨기에 우리는 셀프 페인팅을 하기 시작했다. 남편의 의사도 묻지 않은 채 페인트를 사서 붓을 내미는 모습에 어이없어했지만 이미 사둔 페인트를 어쩔 길이 없어 그는 페인팅을 시작했다. 동생도 불러다가 셋이서 페인팅을 하고, 낮에 첫째를 등원시키고 쌍둥이 임신한 배불뚝이 모습으로 혼자 문짝페인트 칠도 틈틈이 하였다.
그러다 눈에 띈 스위치와 콘센트! 유튜브를 보니 간단하게 뚝딱뚝딱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나는 신나게 콘센트와 스위치를 주문했다.
아빠는 원래 이런 거 하는 거라는 것에 반박할 수 없었던 이유는 친정 아빠는 전기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아빠는 집에 있는 온갖 것들을 셀프로 고치셨고 나는 그것을 보고 자랐기에 아빠란 자고로 집에 있는 웬만한 것들은 자가 수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반면 남편은 아버지께서 불의의 사고로 2살 무렵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빠의 모델을 보지 못했다.
결혼 후 시어머니께서 전등도 갈아 주셨다는 이야기에 경악하는 나를 보고 엄마가 하는 거 아니냐는 덩치 큰 그의 말에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스위치 교체를 해보더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고 했다. 다음은 콘센트 교체. 두꺼비집을 내리고 조심스레 화장실 콘센트를 교체하는데 갑자기 펑! 소리가 난다. 전선의 색을 바꿔서 교체한 것이다. 우리는 그날밤 덜덜 떨며 전기 공사 전체를 다시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돈이 얼마나 들까 걱정으로 밤을 지새웠다. 아침이 되어 아빠에게 여쭤보니 다행히 다시 시도하면 된다고 하셔서 그날의 해프닝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그 후 세 번째 집으로 이사를 가서 콘센트 교체에 재미가 붙은 남편이 자신감 있게 두꺼비집을 안 내리고 전선을 만졌다가 약간 감전이 되었다. 전기가 찌릿하면서 똥꼬로 빠져나갔다는 말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빠에게 sos를 쳤다. 아빠는 능숙한 모습으로 콘센트 교체를 해 주셨고, 그 모습을 보며 역시 아빠들은 일할 때가 가장 멋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결혼 12년 차 남편은 이제는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네 번째 이사 온 현재 집에서는 커튼도 셀프로 달고, 이케아 옷장도 조립해주고, 2층침대 셀프조립, 콘크리트에 못박기등 다양한 일들을 능숙하게 해내는 중이다.
세 아들 녀석들은 빨리 자라 본인들이 그 역할을 해 내길 바란다. 그것을 기다리는 것은 아빠 또한 마찬가지다. 어서 면허를 따서 운전사의 역할을 가져가 달라는 말에 다들 줄을 서 있는데 그 녀석들의 생각이 변하지 않고 지속되길 바랄 뿐이다.
이렇게 아빠는 탄생하고, 아들에게 아빠의 역할을 몸으로 알려 주고 있다. 우리 집에서는 세명의 예비 아빠들이 아빠의 역할들을 충실하게 배우는 중이다. 아빠라는 역할의 무거움이 그에게도 감당하기 어려울 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넓은 가슴을 가진 남자 그 이름은 바로 아빠. 든든한 아빠로 탄생한 그가 참으로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