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너를 '녹차'라고 부를래."
나의 말에 로빗은 입술을 한번 씰룩이고는 개고 있던 빨래를 마저 갰다.
"그래, 알았어. 좋을대로. 근데 너, 수학 숙제는 다 했어?"
"아니, 하는 중이지."
"아까부터 한 시간째 잡고 있던데. 두 페이지 짜리를. 뭐 어려운 거 있어?"
"아니, 그냥 하기 싫어서."
"얼른 해. 그래야 이따가 발레 학원 가지."
"아니, 오늘은 안 갈래."
"뭐야, 숙제도 안 하고, 발레도 안 가고. 엄마가 지금 다 보고 계시거든? 이따 혼나려고?"
"아니, 혼나는 거 싫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오늘 왜 이렇게 심술이야?"
"아니, 심술 아닌데."
"거 봐. 또 아니래."
"아니, 아니, 다 아니야. 다 하기 싫어. 다 안 해!"
"... 아이스 초코 먹으면서 애니메이션 볼래?"
젠장. 너무할 정도로 내가 어떻게 하면 짜증을 멈추는지 너무나 잘 아는 저 존재. 로빗.
"응."
"기다려, 자리로 가져다 줄게."
로빗은 내가 대답하자마자 부엌의 음료 스테이션에서 만들어진 아이스 초코를 거실 소파로 가져다 줬다. 책상 의자에서 좀 떼어 내면 내 기분이 괜찮아질 걸 아는 게지. 나는 마지 못한 척 일어나 거실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푹신한 소파에 깊게 앉아서는 로빈이 건네는 음료를 받아 들었다. 내가 딱 좋아하는 진하기의 아이스 초코. 시원하지만 너무 차갑지 않은 아이스 초코. 그리고 눈앞의 거대한 벽에선 내가 좋아하는 무드의 애니메이션이 나오고 있다.
내가 음료를 마시며 애니메이션을 보는 동안, 로빗은 개고 있던 빨래를 제자리로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선 부엌에 가만히 서있다가, 정말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있다가, 애니메이션이 끝날 때쯤 나의 옆 자리에 앉아 말을 걸어왔다.
"기분 좀 풀렸어?"
"응. 좀 나아졌어."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음, 거짓말 같은데."
"아니야."
"오늘은 '아니병'에 걸린 것 같으니 이만하면 봐줄게. 숙제는 할 수 있겠어?"
"안 하면 엄마가 가만 두겠어?"
"그럴 확률은 그렇지 않을 확률에 비해?"
"매우, 낮다."
"잘 아네."
"알았어. 대신 나 모르는 거 알려줘야 돼."
"당연하지. 참내, 언제는 안 그랬나? 공부방으로 가자."
"업어 줘, 녹차."
"그래, 업혀."
나는 아이스 초코 잔을 거실 테이블 위에 두고는 소파 위로 올라 섰다. 로빗은 나를 업기 편하도록 내 방향으로 등을 돌려 선 다음 테이블 위의 잔을 들고는 나에게 '업혀'라고 했다. 나는 소파 위를 한번 세게 팡 뛰어서는 로빗의 등에 올라탔다. 로빗은 조금의 휘청임도 없이 나를 업어 들고는 부엌 아일랜드 식탁에 잔을 내려놓고, 공부방으로 향했다. 로빗의 포근한 등이 좋은데. 로빗의 빠른 걸음 덕에 방까지 오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이제 숙제 해야지 뭐.
나의 엄마이자 아빠, 형제, 할머니, 할아버지, 친구, 가정 교사, 보모, 보디가드. 그리고, 애인. 로빗의 역할은 이 정도면 대부분을 설명한다고 볼 수 있다. 엄마는 나를 임신하자마자 로빗의 주문 제작에 들어갔지만, 워낙 주문이 밀려 있어 내가 태어난지 3개월쯤 되어서야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로빗(Robit)'이라는 회사에서 만든 휴머노이드 로봇인데 엄마는 나를 가지기 위해 임신을 시도했던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맘카페 후기를 뒤지고 뒤져서 가장 가성비가 좋고, 기능이 알차게 들어있는 로빗을 주문했다고 했다. 현존 최고 인공지능 회사의 유료 버전 등급 중 세 번째 단계의 인공지능을 탑재하고 있고, 인공 피부, 인공 안구, 내분비 윤활유로 관절 부분의 쇠마디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적은 저소음 모델이라고 했다. 자기 스스로 인공 피부 재생 능력이 있고, 소프트웨어나 인공지능은 항상성을 유지하고 있어서 AS 할 일도 거의 없어 엄마와 아빠는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아, 나는 아빠가 없긴 하지만 좋아했다고 한다. 과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