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개같은 하루였다. 그렇게 나의 첫사랑이 짓밟아 뭉개지다니. 내 인생 14년 만에 정말 제대로 겪는 좌절이었다. 아빠가 떠나갔을 때도 슬펐지만, 나에게 정말 중요한 인간을 잃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내 첫사랑이 이런 모습으로 끝날 줄은 몰랐다. 사람을 잃었다고 해야 할까.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너무나 인간적인 그 모습을 좋아했던 것이니 그렇게 이야기해도 되지 않나.
집에 돌아와서는 밥을 제대로 먹지도 않고 깨작거리기만 하니 로빗이 내 눈치를 보았다.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근데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아 보여?"
"뭐."
"밥도 잘 안 먹고, 심각한 표정이길래."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나는 알고 있다. 로빗은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는 걸. 아마도 로빗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나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 정도는. 학교에 갈 때 옷 매무새를 더 가다듬거나, 머리를 다시 매만진다거나, 평소에 안 보던 연애나 고백 관련 영상을 찾아보는 것을 다 기록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잊지도 않는 저 로빗.
"니가 말하기 전에는 난 알 수가 없지."
"거짓말."
"진짜야."
"웃기시네. 어디서 장난질이야."
"어허, 너 말버릇. 말 예쁘게 해야지."
"뭔 상관이냐고."
"왜 그래 너 진짜?"
"아, 알면서 왜 자꾸 물어. 말하기 싫다고."
"난 널 도와주려는 거야. 네 감정이 안 좋은 것 같아서."
"지금은 가만히 날 놔두는 게 도와주는 거야. 좀 닥쳐."
이 말을 하고서는 나도 놀랐다. 로빗에게 이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속상하고, 어이가 없는 이 상황에 대해 계속 물어대는 로빗이 짜증이 났다. 엄마가 물었어도 이렇게 대답했을까? 이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대답하고 싶지 않은데 계속되는 질문에 대한 감정은 똑같았을 것 같다.
"너. 안 되겠다. 오늘은 영상 금지, 게임 금지, 수학 숙제도 혼자 풀어."
"싫어."
"싫어도 할 수 없어. 그게 우리 규칙이니까."
규칙. 어렸을 때부터 로빗과 나는 규칙을 만들어서 지켜왔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엄마나 아빠가 알려줬었고, 조금 더 큰 후에는 부모님과 로빗이 같이 만들어 알려주기는 했는데 초등학교 입학하고 얼마 후부터는 로빗과 둘이서만 규칙을 말하고 지켰던 것 같다. 로빗이 내 숙제를 봐주거나 나에게 자유시간을 줄 때 엄마가 우리의 규칙에 대해 들으면서 별말하지 않는 걸 보면 엄마도 이런 나와 로빗의 규칙에 대해 알고는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은 진짜 그딴 규칙 아무것도 모르겠고, 그냥 방에 들어가 이불이나 뒤집어 쓰고 싶었다. 그런데 숙제를, 그것도 혼자서 하라니. 혼자서 공부하는 것은 거의 해본 적이 없기도 하고, 해볼 생각도 안 했기 때문에 무턱대고 화부터 났다. 숙제를 대체 어떻게 혼자서 하라는 거야. 욕을 하면 내가 좋아하는 영상과 게임 금지, 그리고 숙제도 혼자하는 걸로 규칙을 세웠던 그 과거의 시간부터 모든 것이 저주스러웠다.
나는 밥을 먹던 숟가락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두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서는 바닥만 몇 번 발로 쿵쿵 찼다. 화풀이를 해보려고 했는데 되려 내 발만 아파서 더 기분이 나빠졌다. 심지어 내리치다가 앞에 있던 테이블에 발가락까지 찧어버렸다.
"아!"
피는 나지 않지만 뼈까지 욱씬거리며 너무 아파왔다. 몸도 마음도 왜 이렇게 마음대로 안 되는 거지.
"아우, 오늘 하루 진짜 재수없네."
머릿 속에 든 생각을 내뱉어 보았는데 속이 시원하기는커녕 나쁜 감정을 담은 말이 공기를 채우는 것 같아서 괜히 불쾌해졌다. 소파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듯 바닥으로 내려 앉아 몸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이대로 그냥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다시 그 아이를 학교에서 마주치기도 싫고, 그 남자애랑 붙어 다니는 꼴은 더더욱 보기 싫었다.
그때 딸깍거리며 로빗이 들어왔다. 손에는 내가 좋아하는 초코우유가 든 유리컵을 쟁반에 받치고 서 있었다.
"얘기 좀 할래?"
"그냥 좀 놔두라니까."
"잠깐만. 잠깐만 얘기하자."
로빗은 초코우유에서 눈을 떼지 못 하는 나를 보고는 미소짓는 듯한 얼굴로 내가 앉은 소파쪽으로 밀고 들어왔다. 속일 수가 없는 로빗. 억울한 감정이 들었지만, 그게 저 로빗의 역할이기도 하고 '초코우유를 먹으면 그만이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로빗이 테이블에 올려놓은 초코우유를 잠시간 바라보다가 들어 올려서 연거푸 마셔댔다. 시원하고, 깔끔하게 달고, 초콜릿이 잔뜩 들어 쌉싸름하지만 입안은 텁텁하지 않은 이 완벽한 초코우유는 웬만한 일들은 싹 잊게 만들어줬다.
"첫사랑 실패하니까 기분이 많이 나쁘구나."
"응."
"그래, 원래 첫사랑에 실패하면 그렇지. 예쁜 애였나보네."
"아니."
"그럼 안 예쁜 데 좋아했어?"
"아니, 예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로빗은 궁금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게 아니라 뭐?"
"예쁜 애가 아니라, 예쁜 로봇이었어. 휴머노이드. 변신 로봇이기도 하고."
"뭐? 그런 게 학교에 있었단 말야?"
"응 로봇 회사 사장인가 뭔가 하는 사람 아들이 데리고 다니는 거래."
"그랬구나. 많이 놀랐겠네. 너는 로봇이랑 연애나 결혼은 완전 반대하잖아."
"그니까. 누가 로봇인 줄 알았나."
"로봇인지 티가 전혀 안 났나보네. 근데 뭐, 첫사랑 대상이 누구였든 첫사랑은 원래 그런 법이지."
"뭐가 원래 그런 법이? 내 친구들은 지금 다 잘만 사귀고 있거든?"
"오, 그래? 애들이 그래?"
"응."
"사람이랑?"
"아니. 로봇이랑 하는 애들도 있고."
"그래? 응. 그렇구나. 요즘은 많이들 그렇게도 하지."
"나도 연애 해보고 싶은데."
"하면 되지. 네가 뭐가 부족해서? 너도 잘생기고 매력 넘치잖아! 해 봐, 연애!"
활짝 웃으며 나에게 연애를 해보라며 용기를 북돋아 주는 로빗. 내가 잘생겼다고 하는 로빗. 순간적이었지만 로빗의 눈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입꼬리도. 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걸 느꼈는지 로빗은 더 활짝 웃어보였다. 오늘따라 피부도 더 고와보이고 입술색도 예뻐 보이는 로빗. 몇 초를 그렇게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순간 정신이 번쩍 뜨였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로빗이 예뻐 보인다니.
"숙제 도와줄까?"
로빗은 연신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숙제는 해야 하니까. 그래야 엄마한테도 안 혼나고, 학원에서도 안 혼날 수 있으니까. 숙제를 해야지. 로빗과 같이.
"응, 근데 초코우유 한 잔만 더 먹어도 돼?"
"으이그, 그래."
로빗 없이는 정말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저녁이었다. 엄마가 오늘처럼 외부에서 미팅이 있어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로빗은 나에게 저녁도 만들어주고, 숙제도 도와주고, 재미있는 영상을 보여주거나 게임도 시켜주고, 같이 운동을 하거나 수다를 떨 때도 있었다. 그래서 별다른 친구가 필요 없었다. 오늘처럼 내가 기분이 안 좋을 때도 내 투정을 받아주고, 져주는 로빗이 참 좋았다. 오늘은 엄마가 많이 늦어져 내가 잠드는 시간보다도 늦는다고 했다. 로빗은 나를 씻겨주고, 머리를 말려주고는 편하게 자라고 방에서 내가 잘 때 즐겨 듣는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었다.
그렇게 잠이 든지 얼마나 지났을까. 자다가 갑자기 배가 아파 잠에서 깨어났다. 아까 초코우유를 연달아 두 잔 마신 게 문제인가. 배가 싸르르하게 아파왔다. 잠시 지나면 괜찮아질까 싶었는데 계속 아프고 아랫배를 만져 보니 엄청나게 차가웠다. 일어나 화장실로 나가려는데 문밖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도 같이. 로빗인가?
둘의 대화는 굉장히 다정했다. 엄마한테 저런 목소리가 싶었나? 생각이 드는 높고, 즐겁고, 다정하게 웃는 소리. 그리고 엄마와 대화하는 목소리는 로빗인듯, 로빗 평소 목소리보다 더 낮은 듯한 목소리였다. 익숙하게 들려오기도 했다. 로빗 목소리가 원래 엄마 목소리와 아빠 목소리를 비슷한 톤으로 만든다고는 했는데 그래도 아주 똑같지는 않았다. 엄마와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도 다정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애 괜찮아요?"
"응. 아까 초코우유 두 잔 갖다줬어요."
"아이구. 초코우유 좋아하는 건 애기 때나 지금이나 똑같네 정말. 누구 닮아 그러나 몰라."
"누구 닮기는. 당신 닮았지."
"맞아. 어른이 돼도 초코우유는 너무 맛있는 것 같애. 나도 애기 때부터 그랬다니까요? 근데 오늘은 용량 조절 좀 했어요? 두 잔이면."
"네. 그래서 첫 잔은 약 넣어서 주고, 둘째 잔은 약 빼고 타줬어요. 근데 요즘 우유 먹으면 배앓이를 좀 하는 것 같아서 이따가 깰까봐 걱정이네."
"깨면 다시 재우면 되죠 뭐."
"당신이랑 이렇게 둘이서 계속 얘기하는 거 방해 받기 싫어서 그렇지."
"사실 그건 나도 그래요."
무슨 상황일까. 도무지 믿고 싶지가 않았다. 연애를 하는 게 분명한 두 어른의 대화. 엄마가 연애를 한다니, 그것도 로빗과. 매일 아침마다 뉴스를 듣고, 나처럼 로봇과 인간의 연애에 대해 부정적이던 엄마가 그러고 있다는 걸 내 두 귀로 들으면서 믿고 싶지가 않았다. 그럼 오늘 저녁에 로빗이 나에게 보여줬던 그 예쁜 미소는 뭐였지. 아니, 그 전에 엄마가 연애 기능은 구독 결제를 안 했을 텐데. 나 모르게 따로 결제를 한 건가? 머릿 속으로 여러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보다 더 강력했던 건, 내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이 의심이 진실인지.
나는 내 방안의 모든 스탠드가 꺼져있는지 확인한 후 아주 느리고, 천천히 방문 손잡이를 돌렸다. 그 누구도 모르게. 나는 엄마와 로빗의 장면을 확인할 것이다. 내 의심이 틀리기를. 나는 아직 아빠가 아닌 다른 사람과 있는 엄마를 상상하기도 싫었다. 심지어 그게 인간이 아니라면 더더욱.
아주 천천히 방문이 열리고, 주방에는 주황색 불빛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먼저 보이는 엄마는 베이지색 실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아주 예쁜 잠옷이었다. 엄마의 늘씬한 몸이 잘 드러나는 슬립 원피스. 엄마는 테이블에 기대 서서는 행복이 가득한 눈빛으로 옆의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앞에는 짧은 머리의 남자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로빗이 변신한 건가. 테이블에 앉아 엄마를 바라보고 있는 그 남자는 거의 뒷모습이라 누군지 명확하지가 않았다. 엄마가 그 남자에게 잔을 내밀며 건배를 하자고 하자 남자는 웃으며 잔을 들고는 잔을 부딪혔다. 그리고 잔 속의 와인을 마시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나는 그 남자의 얼굴을 마주했다. 어렸을 때 사진으로 본 적이 있는 얼굴.
젊은 시절의 아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