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의 말간 얼굴이 나를 죄스럽게 만들 때가 있다. 그 시간은 잔인하고, 고통스럽고, 외롭다. 자식의 그토록 고운 얼굴을 보고서 죄책감을 느끼는 인간이 나말고도 또 있을까. 그저 행복만 해야 할텐데 이런 감정이 온당할까. 그런데 어쩔 수가 없다. 엄마로서 자격 상실이라고 해도, 잘 되지가 않는다. 참는 것이.
스태시오포비아(Statiophobia). 라틴어로 정지, 멈춤을 의미하는 statio와 공포를 뜻하는 phobia라는 단어가 합쳐져 만들어진 심리학 개념이다. 2040년대에 들어 자란 세대를 의미하며 만들어졌는데 어떤 것도 기다려 본 경험이 없는 우리 세대-과거 세대가 겪었던 컴퓨터 부팅, 로딩부터 음식이나 음료 제조, 물류 유통, 고객 서비스, 행정 처리 등 기다림이 필요한 일을 겪어본 적 없는 AI 네이티브 세대-를 의미한다. 기다림 그 자체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세대, 그리고 그 안의 나. 기존에 있던 크로노포비아(Chronophobia)처럼 미래가 두렵거나 불확실한 상태에서 시간이 흐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기다림' 그 자체가 비위생과 같은 수준의 혐오 대상이 된 세대이자 시대이다.
그래서 사람과 사랑하는 것이 정말 힘든 일이었고, 보통 이상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내 마음대로 되지도 않고, 내가 좋아하는 저 사람이, 아니 저 사람의 AI 내니(AI Nanny, 휴머노이드에 AI가 결합된 돌봄 양육자)가 나를 어떻게 대하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교육, 돌봄, 상담, 양육, 훈육부터 가족과 친구의 역할을 AI 내니가 다 해주고 있기에 그 집안에 어떤 회사의 내니가 있는지, 부모가 어떤 AI 프로그램으로 세팅해두었는지에 따라 나를 대하는 태도들이 달라졌기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기도, 심지어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두려웠다. 중학교 시절, 좋아하는 아이에게 문자를 보냈다가 5분 이상 기다려 답장이 오는 동안 분당 150 이상으로 심박수가 올라가 안정제를 먹어야 하기도 했고, 대학교 시절 만난 첫 남자친구는 AI 내니가 설계해주는 데이트 프로그램으로 월화수목금토일 다른 애인을 만나고 있는 것을 알고 나서는 연애에 학을 뗐었다. AI 내니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고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내 기다림에 금방 싫증을 느끼고 자신의 AI 내니와 놀거나 부모가 구독한 경우, AI 내니를 애인 삼는 경우들도 점차 늘어갔다.
그런데 아이 아빠는 조금 달랐다. AI 내니로부터 독립심을 지닌 남자였다. AI 내니가 업무와 가사일 쪽만 신경 써주고 대인 관계는 대부분 본인이 마음 먹은 대로 하는 스타일이었다. 느렸지만, 내가 그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나에게 상상력을 불어넣어주었다.
'바로바로 답장은 못 해요. 그런데 그 동안 이 영상 보고 있어요. 지난 번 여행 가서 찍은 영상으로 영화 만들어본 거예요. 시나리오 마음에 안 들어도 바꾸지 말고 끝까지 봐줘요. 당신 생각하면서 만든 거예요.'
'당신 이름 따서 꽃을 하나 만들어봤어요. 씨앗부터 자라는 것까지 보고 있어요. 회의만 금방 하고 올게요. 이따 꽃 어떤 게 마음에 들었는지 말해줘요.'
'이번 주말에 집에서 같이 메타버스 여행해요. 어떤 맵 여행하고 싶은지 설계해놔요. 나도 내 맵 만들어 갈게요.'
나에게는 더없이 낭만적이 순간들이었다. 간접적이면서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마음을 깊게 울리는 낭만. 모든 것이 기다림이 없는 이 시대에서 나는 느린 기다림을 조금씩 경험해 갔고, 그 사람이라면 기다릴 수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다음에 무엇이 있을지 기대가 돼서였다. 그 기대 속에는 다음의 여행, 다음의 노래, 다음의 산책이 있었고, 시간이 더 지나서는 하나의 가족이라는 기대도 그 사람의 청혼을 통해 실현되었다. 나도 점점 나의 AI 내니로부터 어느 정도는 독립할 수 있었고, 나의 업무, 가사, 미용, 신체 건강, 심리상담 등의 역할을 하던 것에서 심리상담은 많이 줄었다. 남편과 이야기하면서 해소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심했었다. 이 사람과 결혼하기로.
오랜 시간을 기다려 생긴 아이는 AI도 어떻게 하지 못 하게 열 달을 뱃속에 꼭 품고 있어야 했다. 이렇게 긴 시간을 기다려본 적은 태어나 처음이었기에 스트레스나 불안이 밀려올 때가 있었다. 태아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안정제를 먹어야 하는 때도 있었지만, 웬만해서는 약에 의존하지 않으려 노력했었다. 스태시오포비아가 한 번씩 심하게 찾아올 때면 신랑은 앞으로 우리 아이와 지낼 날들에서 우리가 얼마나 행복할지, 힘들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어떻게 같이 해결해나갈지 이야기를 나누어주었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나누다가 공포는 사그러 들고 이내 평안해지곤 했다.
우리가 결혼을 하면서 나의 AI 내니와 신랑의 AI 내니 두 대를 모두 유지하는 것은 금액적으로 부담이 컸기에 우리는 피지컬 AI인 휴머노이드는 하나만 유지하여 집안에서 가사를 담당하게 하고, 디지털 AI는 통합해서 사용했다. 휴머노이드는 내가 쓰던 것을 가져왔는데, 연식이 오래 돼서 변신 기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아이가 태어나면서 새로운 휴머노이드를 주문했다.
여러 정보를 수집하고 고심 끝에 선택한 휴머노이드는 가장 실력 좋은 회사에서 만든 튼튼하고 인간적인 로봇, 로빗. 이제는 노인이 된 창업자가 옛날옛적 키보드를 사용하던 시절에 자신의 오래된 사업 계획서에 난 오타인 'robit'을 보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실수라는 데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이름의 로봇이었다. 대화나 사고, 감정은 가장 인간과 흡사하게 하지만 휴머노이드의 변신 폭도 넓고, 내구성도 좋다는 평이 많았다. 이름도 로봇(robot)에서 한 글자만 다른 로빗(robit). 제작되어 받는 데까지 시간은 좀 걸렸고, 가격도 있었지만 아이의 AI 내니가 될 것이라 큰 마음을 먹고 투자했었다.
남편은 아이가 1살이 될 때까지만 AI 내니를 쓰고, 2살부터 8살까지는 AI 기능은 빼고 로봇으로만 쓰자고 했었다. 그게 인간의 사고력과 독립심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가 요즘 계속해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나부터도 AI 내니에 의해 길러졌기 때문에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AI 없이 나 혼자의 삶을 사는 것도 어려운데, 다른 사람의 인생을 책임지는 육아를 어떻게 혼자, 또는 인간과만 할 수 있을까. 아이에게 순간순간 생기는 건강 문제나 사고 처리를 AI 내니의 도움 없이 하는 것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이러한 의견 차이는 조금씩 가족의 분화를 만들어냈다. 로빗이 중간에서 중재를 해주려고 했으나, 이미 통합된 우리의 디지털 AI는 어느 한쪽의 편을 완벽하게 들어주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나와 남편 또한 우리를 중재하는 AI가 우리 둘 사이의 공용 AI라는 점에서 완전하게 의지하고 신뢰하기가 어려웠다. AI와 얘기를 하다 보면 '가재는 게 편'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남편의 입장과 상황을 비호했고, 남편은 내가 AI 구독 프로그램을 설계했기 때문에 AI가 내 편만 들고 있다는 의심을 강하게 하며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