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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을 Mar 21. 2024

죽음의 크기

돌멩이(아이의 슬픔과 두려움)에서 바위(어른의 죄책감)로 변한 죽음

적은 나이가 감당할 수 없는 준비되지 않은 세 개의 죽음을 만났다. 6살 어느 날 세상에 엄마라고 불렀을 사람이 사라졌다.


10살 아빠라고 부르던 사람이 우리 집, 우리 방에서 마지막 인사말도 없이 갑자기 떠나고 난 뒤, 그날 이후 방에는 어두컴컴한 것이 벽에 배어 있어 전등을 켜도 환해지지 않았다. 두려움과 싸워 이길 용기가 없어 늘 나의 발은 갈 곳이 없었지만 환하다 못해 투명해 보이는 밖을 향해 있었고 그렇게 집 없는 아이처럼 배회하고 또 배회했다.


죽음이라는 돌멩이를 어떻게 치워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떠돌던 석 달 무렵 할머니의 죽음은 바위가 되어 나타났다. 이번에는 눈물도, 울음도 나지 않았다.


세 번의 손님이 오고 가는 동안 한 어른도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나를 들여다봐주지 않았다. 죽음이 슬픈 이유를 아홉 살 인생이라는 책의 한 구절에서 읽었다. 아 그렇구나.


죽음이나 이별이 슬픈 까닭은 우리가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줄 수 없기 때문이야. 잘해주든 못해주든 한번 떠나버린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지. 사랑하는 사람이 내 손길이 닿지 못하는 곳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슬픈 거야...   
<아홉 살 인생> 위기철


울어야 할지 찡그려야 할지 무표정이어야 할지 도저히 알 길 없는 애매한 얼굴은 떼어놓고 어른들이 앉아 있는 좁은 틈 사이를 파고들어 정체 모를 불안감에 떨고 있던 몸을 간신히 뉘었다. 상을 치르느라 방이 아닌 방치되어 있던 외부 공간에 임시로 선을 끌어다 밤새 켜놓은 노랑보다 두텁고 주황보다 얇은 색의 불빛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잠이 들었다.  밤이 춥고 길었지만 사방이 어른 모양의 문으로 둘러져 있어 두려운 것도, 위험한 것도 얼씬하지 않았다. 10살의 내가 세상 제일 사랑했을 가족의 죽음으로 울음 말고는 다른 일체의 감정이 허용되지 않는 공간이었지만 희한하게 안도감, 아늑함에 몽롱해졌다


 발인날, 그 밤의 것들을 모두 내 어깨에 짊어지고 꾸불꾸불한 산길을 올랐다. 내 두 눈동자에 담기는 눈물의 양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 깊게 파인 구덩이에 힘껏 던져 나무관과 같이 묻어버렸다.


30년이 지나도 썩어서 무로 돌아가지 못한 나머지 것들은 어느 날들 어느 순간들에 노랑빛과 주황빛의 비율은 대체 어느 정도의 밝기였는지 그렇게도 나른했을까가 의문으로 남아 불쑥불쑥 스위치도 없이 켜졌다 꺼지길 반복했다.


지금의 나이만큼 되어 이제는 들켜도 나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엉뚱한 자신만만인지, 행여 비난의 소리를 들어도 당신이 나였어도 그랬을 거야 라며 항변할 수 있는 단단함이 생겼는지 켜져 버린 불을 일부러 끄지 않고 그날의 불빛이 마구 뿜어대던 황홀한 나른함을 지켜본 밤들을 지나고 지나 결국 나는 그 불빛 아래 느꼈던 죽음의 크기가 10만큼의 슬픔과 두려움에서 40만큼의 죄책감으로 변했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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