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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트루 May 14. 2019

식물을 꼭 죽이고 맙니다

인간이나 식물이나 관계에 상처 받긴 매한가지입니다.

이유 없이 꽃을 산 적이 있다. 

차디찬 시멘트 바닥 위에 전시되어 있던 꽃이어서 그랬나. 나도 모르게 그냥 집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평생 남에게 꽃을 받아는 봤어도 내가 나를 위해 산 적은 없었는데 이상하게 그날따라 꽃이 사고 싶었다. 남자친구에게 선물할 거냐고 물어보는 꽃가게 주인에게 자초지종 설명하고 싶진 않아서 그냥 그렇다고 하고 예쁘게 포장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데이트라도 하러 가듯이 꽃을 조심스레 안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 일주일도 안돼서 죽이고 말았다.


나름 화분도 새로 사서 정성스레 분갈이와 꽃꽂이도 했었다. 물도 자주 줬고 햇빛도 잘 드는 곳에 올려놨었다. 그런데도 야속하게 빨리 시들어 버렸다. 물론 꽃다발의 꽃은 화분에서 자란 식물보다 빨리 시든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그래서 그랬나 보다. 어차피 빨리 시들 걸 알아서, 헤어짐을 예상하고 시작한 만남이라는 걸 알아서. 


괜한 오기가 생긴다. 며칠 후, 새로운 식물을 사서 데려온다.


페라고늄 랜디. 화분이 잘 못 된 걸까. 결국 시들어버렸다.


취업을 하고 인천에서 서울로 출근하다 보니 새벽에 나가고 밤늦게 들어오면 꽃을 돌 볼 시간이 없었다. 지친 내 몸 먼저 돌보기도 바쁜데 느긋하게 꽃이나 바라볼 시간이 없었다. 꽃에 물 한 번 줄 때도 잠들기 전 마지못해 주거나 정말 귀찮을 땐 엄마에게 부탁하곤 했다.


그렇게 식물이 시들어버리면 이래저래 변명만 많았다. 일이 바빠서, 식물을 잘 기르는 고수가 아니라서, 원래 빨리 시드는 꽃이라서, 집이 식물을 기르기 좋은 환경이 아니라서 등등. 구차한 변명만 늘어놓다 보면 어느새 내가 구차해진다.


한 번은 친구가 내게 물었다.


“죽일 거 알면서 왜 기르는 거야?”


내가 무슨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죽이려고 기르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그런데 더 기분이 나쁜 건 반박을 못하는 나 자신이었다. 그러게. 나는 데려 온 식물의 결말이 다 비슷할 걸 알면서도 왜 길렀을까.

끝끝내 죽지 않고 새로운 봉우리를 피운 꽃을 보여주며 ‘나 사실 식물 잘 길러.’라고 반증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다육이 친구들. 아직까지 무사하다.


무언가를 기른다는 것, 엄연한 생명이 있는 것을 들인다는 건 책임감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내 인생에 대한 책임감도 부족한 상태였다. 첫 사회생활에 설렜지만 기대했던 것만큼 상처 받는 일도 많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꽃이 피고 지듯이 꾹 참고 버티면 내 인생에도 꽃이 필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니 아니었다. 꽃은커녕 어디에 뿌리를 내려야 할지도 모른 채, 무엇을 피워야 하는 줄도 모르는 채 그저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나 하나 제대로 건사할 여력이 없었다. 

하물며 늘 같은 자리에 있는 화분 속 꽃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는 마음이 아팠다.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집에 온 그날 밤. 깜깜한 방, 책상 위에 우두커니 시들어 있는 그 꽃을 보면서 ‘너도 나랑 같구나.’라고 읊조리며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책임감 없던 나와 적당히 물만 잘 주면 될 거라는 어리석은 자신감이 만나 식물을 또 죽이고 말았다. 

어쩌면 내가 지치고 힘들어 간혹 물을 못줘도 꿋꿋이 잘 버텨내주길 바라는 나의 이기적인 마음이 가장 큰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푸르던 잎이 노르스름하게 변하고 부드럽던 꽃잎이 황태처럼 바싹 말라 떨어질 때는 이미 늦었다. 식물을 잘 기르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다시 살려낼 수도 있으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애꿎은 식물만 들이고 죽이느니 그냥 꽃집에 있는 게 낫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식물로 둘러싸인 카페. 주인은 과연 어떻게 다 관리를 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어쩌면 이건 자기반성이다. 식물도 인간과 똑같다. 나의 지친 마음과 어리석은 행동으로 상처를 받기도 하고 시들어버리기도 한다. 무언가를 들이고 관계를 맺는다는 것, 그것은 책임감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법이다. '바쁘다', '힘들다', '귀찮다'라는 말을 할 때면 금세 내 머릿속 식물의 존재는 온데간데없다. 그러면 내 방에 또 하나의 생기는 그렇게 사라진다. 그리고 그걸 보며 난 또 마음 아파한다.


그리고 마침내 깨닫는다.

책임감과 관심을 갖고 너를 기억하는 것.

너의 존재를 잊지 않고 의식하는 것.

그것이 내가 너와의 관계를 죽이지 않고 유지하는 방법이라는 걸 깨닫는다.


칼랑코에. 꽃말은 설렘. 마음에 든다.


전자제품 매장에서 에어컨을 샀더니 사은품을 줬다. 보통 반찬통이나 조리도구를 받았는데 독특하게도 화분에 담긴 꽃을 준다고 했다. 다시는 식물을 키우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어느새 내 손엔 화분이 들려있었다. 거절할 틈도 없이 감사하다며 받아온 이 꽃을 멍하니 바라본다.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그나마 다른 꽃에 비해 쉽게 키울 수 있다는 인터넷 설명 한 줄에 마음이 놓인다.


신은 용기를 달라고 하면 용기를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신다고 한다. 왠지 그 말이 떠올랐다면 우연일까. 더 이상 무언가를 책임지는 일에 물러서지 말라는 하늘의 뜻인가 싶다. 그리고 다짐해본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하지만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화분을 꼭 안고 있는 나에게 남편이 물어본다. 

“이번엔 안 죽일 수 있겠어?”


내가 대답한다.

“노력해야지.”


너의 존재를 잊지 않고 꾸준히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게 내가 앞으로 너를 위해 해야 할 일이라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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