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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피아노를 팔 수 없었다

by 김트루

엄마는, 피아노를 팔 거라고 말했다. 아무도 치지 않는 피아노는 이제 방 한구석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먼지만 쌓여 간다고 했다. 고물상에 내놓으면, 많이 줘야 10만 원 정도 받을 거라고.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나를 감쌌다.

그런데도 나는 말했다. “그럼 얼른 파는 게 낫겠네.” 그리고 이상하게도, 갑자기 피아노가 치고 싶어졌다.


엄마는 나와 내 동생을 피아노 학원에 보냈다. 여자 아이라면 열에 아홉은 배우는 그 시절 흔한 피아노 학원.

피아노는 꽤 비쌌다. 당시 아빠의 한 달 월급과 맞먹는 가격. 하지만 엄마는 망설이지 않았다. 어느 날 집에 오니, 방 한구석에 거대한 그 녀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몇 달간, 그 피아노는 나의 온 관심을 독차지했다.

친구들 사이에선 피아노가 있는 집이 드물었고, 나는 그 사실이 괜히 우쭐했다.


나는 돈값을 해냈다. 어렸을 땐 피아노 콩쿠르에도 나가서 상을 받았고, 하얀 드레스를 입고 질끈 묶은 머리에 처음 해본 짙은 화장까지. 연주회를 나가는 건지 패션쇼를 나가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덕분에 그날의 기억은 내 유년시절 가장 선명한 장면 중 하나로 아직도 남아 있다.


주말이면 낮잠 자던 아빠의 입에서
“피아노 좀 그만 쳐!”
소리가 나올 만큼, 나는 쉴 새 없이 피아노를 쳤다. 유명한 가수의 악보를 사서 연습했고, 잘 닿지도 않던 페달은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고 쥐가 날 정도로 밟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피아노보다 내가 더 커졌고 페달도 잘 닿게 됐을 무렵, 나는 피아노를 그만뒀다.


세월이 흐르며 피아노 위에는 내 물건, 옷가지들이 하나둘 쌓였다. 그리고 함께 흘러가는 시간도 쌓였다.

더는 아무도 연주하지 않는 피아노는 목소리를 잃었다. ‘도’를 눌러도 ‘도’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후로 피아노를 완전히 잊었다. 가끔 여자 아이들끼리 모이면 서로 어디까지 쳐봤냐며 웃고 떠들었지만, 피아노는 그저 같은 시절을 공유한 추억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한 번쯤은 쳐봤지만 지금은 아무도 치지 않는, 그저 그런 어릴 적의 이야기.


그러던 어느 날, 엄마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피아노 그냥 안 팔기로 했어.”

“왜?”

“좀 아깝기도 하고… 네가 안 치더라도, 나중에 손자가 와서 칠 수도 있잖아.”


결국 엄마는 피아노를 팔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팔지 못했다가 맞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쓸모 없는 피아노. 자리만 차지하는 피아노. 그 피아노가 뭐가 아쉬워 팔지 못했을까. 아마도, 엄마는 그 피아노를 보며 시원섭섭했을 것이다. 아빠의 한 달 월급을 털어 산 피아노. 두 딸의 손때가 가득 묻은 피아노. 집 안 가득 울려 퍼지던 그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게 된 것에 대해 엄마는 나와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를 나눴다. 전화기 너머로 엄마의 표정이 그려졌다. 엄마가 바라보고 있었을 그 피아노도 떠올랐다. 엄마는 피아노가 사라지는 게 아쉬운 게 아니라 두 딸이 함께 젓가락 행진곡을 치며 낄낄 웃던 그 모습이 더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게 더 아쉬웠던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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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비록 사용하진 않더라도, 시선 어딘가에 머물며

보기만 해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그런 것들. 어느 날, 문득 떠오른 기억에

“그거 어디 있지?”
하며 찾게 되는 것.


그리고 결국, 다시 두 눈으로 확인했을 때 찾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살짝 울컥하는 그 감정.

우리는, 어쩌면 그 찰나의 감정을 위해 무언가를 버리지 못하고 오래도록 품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너라도, 변하지 않기를. 모든 게 빠르게 변해가는 이 세상 속에서 너만큼은, 그때의 기억 속 모습 그대로 남아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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