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들이는 음식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내일?? 집들이를??”
그렇다. 갑자기 친정 부모님이 집들이를 내일 하는 게 어떠냐고 한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
지금 시간이 밤 10시인데 문을 연 마트가 있나? 수저랑 그릇은 안 부족한가? 메뉴를 뭘로 하지? 갈비찜, 밀푀유 나베, 잡채, 무쌈말이 등 다 할 수 있을까?내일모레가 설날인데 이거 진심인가?? 몰래카메라가 아니고?
그런데 몇 분뒤, 이 소식을 들은 시부모님이 전화로 하는 말은 뜻밖에 더 놀랍다.
“요즘 누가 며느리한테 음식 하라고 하니~ 그냥 밖에서 먹자.”
하지만 결국 밖에서 식사를 하지 않았고 집에서 집들이를 했다. 그렇다고 내가 혼자 모든 집들이 음식을 하루 만에 했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난 오로지 밑반찬만 준비했다.
친정엄마가 마침 집에서 준비한 갈비찜을 가져오시고 시부모님은 수산시장에서 회를 떠 오셨다. 그리고 집들이 당일엔 친정엄마와 함께 잡채만 만들었다. (잡채도 사실 엄마가 아침에 이미 재료 손질을 해왔고 난 당면만 삶았다) 알고 보니 친정엄마도 집들이가 별거냐며 밖에서 식사만 하고 집에선 다과만 하는 걸 원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집들이를 하루 전 날에 권유할 수 있던 거라고.
그냥 편하게 밖에서 먹을까 했지만 아직 한 번도 신혼집에 와보시지 않은 양가 부모님을 위해 집에서 모두 모여 식사를 하고 싶었다.
사실 양가 부모님 집들이는 3월에 할 예정이었다. 식구들이 시간이 다 맞지 않아서 좀 늦어질 것 같았는데 친정엄마가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설에 자식이 무조건 부모님을 뵈러 가는 게 아니라 부모가 자식을 보러 갈 수도 있다는 논리를 주장한 친정부모님이 신혼집 구경도 할 겸 우리 집으로 온다는 게 시부모님도 마침 시간이 맞아 집들이로 판이 커진 것이다.
그렇게 집들이는 하루 전날에 결정된 거고 덕분에 나는 친구들을 초대할 때 보다 오히려 더 편하게(?) 양가 부모님 집들이를 준비했다. 약간의 긴장과 함께 시작한 집들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답게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다과와 함께 커피를 한 잔 마시며 마치 짠 것처럼 각자 준비한 선물 증정식도 거행했다.
집들이 번개는 그렇게 나무랄 것 없이 아주 무사히 잘 끝났다.
기분이 묘했다. 남편과 둘 만 지내던 곳에 처음으로 양가 부모님과 모든 식구들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하는 게.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준비한 음식이 아닌, 각자 가져온 음식을 차려서 함께 식사를 한다는 사실이. 그날 저녁, 난 핸드폰 메모에 적어놨던 그 많던 집들이 음식 리스트를 모두 삭제했다.
하고자 했던 음식은 하나도 못했다. 하지만 집들이는 아무 문제없었고 오히려 너무 행복하게 대성공이었다.
음식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모인 사람들의 마음이 중요한 거지. 어떻게 보면 이것도 복이다. 인(人) 복.
명절에 자식이 무조건적으로 부모님 댁으로 와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리라는 친정부모님이나 집들이 음식을 요즘 누가 며느리 보고 다 차리라고 하냐며 밖에서 먹자는 시부모님이나. 가족 중 누구라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거나 조금이라도 뜻이 맞지 않는다면 한국에서 며느리가 아무것도 안 하는 집들이는 사실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만큼 나와 남편을 많이 사랑해주시고 아껴주신다는 말이니 이 얼마나 행복하고 그분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겠는가.
그뿐인가. 허리가 아픈 우리 아빠를 위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아침 일찍 직접 차로 모시러 간 남편이나 집들이 선물로 장장 6개월 동안 남편과 내 결혼사진을 바탕으로 한 땀 한 땀 색칠한 그림 액자를 준 아가씨의 정성 어린 선물 등 이 모두가 내 인복이라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이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리고 나중에 남편과 단 둘이 맥주 한 캔을 하면서 생각한다.
이 맛에 결혼생활한다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