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대상과 주체, 그리고 효과
농학도로서, 자주 듣는 몇 개의 위기를 다시 생각해 본다.
경제위기, 민주화위기, 기후위기, 자원위기, 식량위기 등
다른 것도 많지만, 이 다섯 개만 생각해 보고 싶다.
1. 위기의 대상은?
위기가 온다고 하는데, 주어와 목적어가 빠져서 생기는 개념적 혼란이 있다. 위기의 원인과 그 대상은 무엇인가? 이 관점에서 볼 때, 경제위기와 민주화위기는 다른 것들과 다르다. 왜냐하면, 속칭 '위기'라는 것을 겪고 난 후, 누군가는 더 상황이 좋아지고, 누군가는 상황이 더 나빠진다.
결국, 이것들은 위기를 유발하는 존재의 가능성을 전제하게 되고,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게 되는 계층이 존재하게 된다. 물론, 다른 위기들도 그런 속성을 보이지만, 이 두 가지는 위기 유발의 주체와 객체가 비교적 분명하였음을 알게 된다.
요컨대, 경제위기와 민주화위기는 '인류 모두의 위기가 아니다'
2. '기후위기'는 위기일까?
기후위기라는 말을 많이 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인류가 자연과 다른 속성을 가진 측면이 있어 그렇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제한된 곳에 살고, 문명의 발달은 사실 집단적 이주를 거부해 왔다. 그래서 국경이 공고해진 것이다. 이 체제 하에서 단일된 생활 습관, 단일된 규범과 법, 단일된 경제 체제를 구축한다.
기후위기 내용 중에는 지구 전반에 걸친 기온 상승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어느 지역은 추워지고 어느 지역은 더워진다. 어느 지역은 오히려 기온상승이 기회가 되어 농지가 증가한다. 그곳은 인력이 모자라지만 사람들은 그곳으로 가기에 너무 어렵다.
기후위기의 대처 방법을 이야기하라면, 나는 '국경을 느슨히 하고, 이주를 자유롭게 하라'라고 하고 싶다. 그렇게 되면, 기후변화에 대하여 '위기'가 아닌 '기회'의 효과가 증가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상황을 '적응'의 방법으로 대처하기에 유리하다.
사람들은 이제 정주하지 않고, 좀 더 자유롭게 바다를 떠다니는 배 위에서 살거나, 단체로 이동하는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는 상상을 할 수도 있다.
3. 과연 궁극적인 위기란?
그런데, 이 모든 위협 요소들 중에 진짜 인류에게 닥치는 '위기'가 있으니, 그것은 식량을 포함한 '자원 위기'다.
우리 실생활에 가장 필수적인 (먹을 수 있는) 물, 식량, 그리고 식량원인 작물과 가축을 기르게 하는 비료원, 마지막으로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각종 에너지원들이다.
사람들은 에너지 자원에 집중하지만, 이것은 아직 여유가 많은 이야기다. 에너지원 만으로 필수 원소들을 모두 합성할 수 없다. 대체 불가능한 영역에 있는 것이거나, 채굴이나 습득, 채집의 방법이 훨씬 더 경제적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보통 하이테크 기술의 방법은 보통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접근하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 간, 계층 간, 지리적 격차가 발생하기 때문에, 늘 인권 문제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이런저런 이유로, 절대적 부족이 예상되는 물과 자원의 위기는 모든 인류 한 명 한 명에게 무차별적인 위기이기 때문에, 이것은 기술혁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 '선기술, 후정책' 차원의 접근인 것이다. 반면, '경제, 민주화, 기후'는 '선정책, 후기술' 차원의 접근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4. 물과 자원위기의 근본적 해결책은?
양적으로 부족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무역 활성화, 지구 내 순환고리를 안정화시키는 것이다.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큰 위기는 식량의 생태순환고리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작물을 재배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물과 비료가 지역적으로 부의 흐름에 따라 집중되고 정지하고 분리되는 현상이다. 어떻게 하면 불용화된 물과 비료를 원활히 순환하게 할까?
장기적으로도 이 정도 접근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된다. 인간 모두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상당 부분 양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과 비료를 합성해 내거나 더 채굴하거나 해야 한다. 그런데, 이 문제는 지구의 에너지적 불안정성을 키운다. 그럼 사용자 수를 줄여야 한다.
결국, 가장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는 주체가 지구를 떠나서 물, 비료, 에너지가 풍부한 곳으로 떠나는 것이 지구를 살리는 것이다. 정말 머나먼 SF적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우주청' 설립 이야기를 듣자면, 꼭 공상과학 이야기 같지가 않다. 인간은 1950년 이후부터 자연을 노예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인간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 자연재해를 효과적으로 컨트롤하고 있고, 훨씬 많이 생존하는지를 통계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팩트풀니스'라는 책을 읽기를 권한다. 숫자로 헤아릴 수 없던 재해와 인류적 재앙은 1950년을 기점으로 갈라지며, 그 이후 우리 인간은 더 이상 인간 자체에서 착취의 대상을 이런저런 이유로 만드는 것을 정당화하지 못했다.
따라서, 인간은 번영의 몫을 모두 자연착취에서 감당해 왔고, 과학기술은 '비교적' 단기적인 물과 자원의 경제적 확보 방법에 집중해 왔다.
나는 가끔 인류 문명 발상지가 사막이나 초원이었다는 것을 보면서 이런 상상을 한다. 왜 저곳이 사막이나 초원이 되었을까? 어떻게 물과 자원을 확보했을까? 하천의 범람, 단단한 땅에 적응하는 작물 등의 방법으로 설명하지만, 어쩌면 인간은 그곳을 황폐화시키며 꾸준히 이주하지 않았을까? 그 결과로 우리는 지구상 어느 곳에나 있다.
5. '위기'는 불공평한 단어다.
위기라는 단어 앞에 붙는 어느 것도 우리 인류의 한 명 한 명에게 의미 있는 단어가 아니다. 이것은 집단적인 것인데, 그것이 인류 중 어느 한 집단일 수도, 아니면 전체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앞의 것은 정책주도적인 결단이 필요하고, 뒤의 것은 엄청난 수준의 과학기술 혁신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위기는 모두에게 불공평한 단어다. 인류에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여겨졌던 Covid19에 우리는 패배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조금 더 이해의 수준을 높였지만, 이렇다 할 교훈을 얻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파생시키는 수많은 효과는 살아남은 개인들에게 트라우마와 관절염 같은 통증을 남겼다. 죽기보다 사는 것이 낫다면 할 수 있는 선택이지만, 남은 인생은 불과 수십 년, 세상은 더 고령화되고 청년들은 세상이 살만한 곳이 아니라는 부정적 의견이 늘었다.
지도자들은 더 국가주의적인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다. 국경을 느슨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인 국제협력기구들은 힘을 잃고, 초국가적인 종교와 예술은 힘을 잃고 있다. 과학기술도 국가 단위의 경쟁력 강화에 대해서만 지원을 받을 수 있고, 그 성과는 인류적 차원의 공유물이 되기보다 산업재산권 소유물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