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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중현 Jan 20. 2024

왜 젊어서 두루두루 봐도 소용이 없나


젊어서 많은 경험을 하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 나름이다. 너무 많은 경험은 독이 된다고 생각한다.


난 음반을 좋아하니, 음반을 예로 들어 설명을 해 보겠다. 아무리 음반을 좋아해도 우리 집에는 흔한 노래 음반이 별로 없다. 대부분 애써서 구해야 하는 음반들이다. 희귀 음반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많다.


이게 음악을 듣는 수준을 다르게 한다. '들려오는' 음악은 '듣는다'라고 하기 어렵다. 거리거리마다 자동차의 라디오에서 흔히 나오는 음악을 듣는 것을 '음악감상을 한다'라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렇게만 음악을 들으면 많이 들을 수는 있으나, 그 음악을 듣기 위해 애쓴 경험이 축적되지 않는다.


희귀 음반을 찾아 음반을 사서 음악을 듣는 사람은 비싼 값도 치르지만, 그 과정은 '음악을 찾아 듣고 말겠다'라는 본인의 의지에 음악이라는 보상이 주어진다. 보통 이렇게 쌓인 것이 축적되고,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대상에 대해 '깊이'가 생긴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 것들이 더 깊어지면, 우리는 '인싸이트가 있다'라고 한다.


나는 요즘 음악을 들으면서 정말 좋은 것이, 음악을 듣는 데 목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음악을 들었다, 음반을 샀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악을 들으니 너무 좋아서, 그 좋은 마음으로 페북에 올린다. 그런데, 20대에는 내 안에 음악이 없으니, 음악을 마구 채워 넣기 바빴다. 자꾸 듣고 채워야 했고, 그 음반을 구입했다는 것 자체가 자랑거리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니, 음악을 듣고 '아, 참 좋다'라고 느꼈던 경험이 별로 없었다.


음악을 좋아하면, 그 음악과 음악가, 음반 구석구석의 정보가 다 관심이 생긴다. 그렇게 쌓이고 쌓여서 축적되고 인싸이트가 생긴다. 인싸이트가 생기면 그다음의 그 분야의 새로운 내용들은 아주 쉽게 들러붙는다. 음반 소유 그 자체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음악을 들어봤다는 경험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 음악을 들으면서, 그 음악가에게 나의 질문이 생기고, 그의 느낌과 내 느낌이 공명하기 시작한다.


그럼 이러한 내용을 조금 확장하여 생각해 보고 싶다.


젊을 때 여행을 많이 가라고 한다. 여행의 비용은 참 비싸다. 그리고 막연하게 많이 보고 온다. 첫 번째 여행은 누구도 잊기 어렵다. 가장 많은 것을 얻는다. 그리고 고생한 여행도 잊히지 않는다. 그 여행 안에 '나'의 존재가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여행이 있다. 누가 가자고 따라간 여행, 포맷이 잘 짜여 있는 여행, 자랑하려고 가보는 여행은 가면 안 된다. 그 여행을 나이 들어서 하는 것은 정말 우습지만, 젊어서 그런 여행을 너무 많이 가면, 그냥 돈과 시간 낭비일 뿐만 아니라, 더 좋은 기회를 잃게 된다.


여행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영화를 많이 보는 것도, 미술관을 가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그리고.... 다양한 친구를 사귀거나 연애를 하는 것 마저도, 숫자 늘리기나 목표 의식을 가지고 하면 안 된다. 그 자체를 알아가는 깊이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없는 숫자만 늘어나게 된다. 이 숫자를 훈장으로 알고 과시하는 껍데기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무서운 순간은 요즘 내 나이가 되어보니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는 책을 읽어도 음악을 들어도 자랑할 마음이 없다.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왜 소용이 없을까? 목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음악을 듣고 책을 읽는데, 내가 시험에 잘 붙을 것도 아니고, 취직을 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그것 자체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20대에 구입했던 음반들 중에는 딱 한 번 플레이되었던 것들이 있다. 그 안의 음악들은 완전히 잊힌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 음반들에 잘 손이 가지 않는 이유는, 그 커버가 익숙하기 때문이다. 외형이 익숙해지면, 그 안의 것들을 잘 알지 못해도, 그것이 저절로 구식이 되어 버리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유가 목적인 사람은, 아니면 그것을 가지고 과시하거나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은, 영원히 그 음반을 꺼내어 들지 않을 것 같다.


오래된 음반과 음악들은 내가 얼마나 얕은 사람인지를 측정해 준다. 사다 놓고 읽지 않은 책도 그렇다. 한 번 말을 건네 본 사람들의 이름이 있는 수많은 명함들이 그렇다. 그리고 내가 흘려듣고 아는 체했던 수많은 순간들에 대한 확신이 조금씩 무너질 때마다, 내가 차라리 젊을 때 더 깊은 '숙련'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중학교부터 박사 취득까지 수원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대학원 이후 줄곧 한 가지 대상에 대하여 공부했다. 그렇다고 그렇게 공부의 깊이가 깊지 않았다. 그것을 그냥 했던 것 같다. 다만 그 주변에서 그리 멀리 가지 않았을 뿐.  내가 얼마나 그 공부를 진심으로 다 했는가를 생각해 보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나만 아는 비밀일 것이다.


알아도 확실하게 말하길 두려워하게 된다. 몰라도 아주 모른다 하기 어렵다. 그게 혹시 앎의 깊이가 생기는 것이라 막연히 생각해 본다. 젊어서 너무 얕고 넓게 아는 공부를 시키려고 하는 현대 사회에서 생각해 본다. 흘려듣고 보아 아는 것은 진정한 앎이 아닌데, 우리는 너무 쉽게 여행하고, 너무 쉽게 정보를 취하고, 너무 쉽고 짧게 요약만 듣고 판단할 것을 강요당한다.


세상은 사실, 그렇게 딱 구분되어 있지도 않고, 우리를 둘러싼 자연은 모두가 그렇게 '자연'스럽게 뭉쳐져 서로 엉켜 돌아간다. 우리 인간의 인식만이 그것을 산산이 쪼개고 다시 마음대로 엮어 붙여서 '융합'이라고 부른다. 그 안에서 나 혼자만의, 그리고 우리만의 세상에 갇혀서 만족한다. 꼭 캥거루 새끼가 불안하면, 다 커서도 엄마 캥거루 주머니로 들어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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