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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에 애국심이 필요할까?

애국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리, 그 해결은 로컬과 글로벌 관점 차이에서

by 진중현


종종 농업기술센터를 방문하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 저개발국가에서는 농업기술센터의 역할이 매우 크다. 왜냐하면, 농민의 기술 수준이 너무 낮고 경제적 여력이 없어서, 국가가 주도적으로 기획 및 연구개발하고 그 성과를 공유해야 하는데, 그것은 탑다운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 말단의 미세혈관 같은 조직이 각 지방 시군단위의 농업기술센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라가 선진화되고 다양성의 요구가 커지며, 농민의 지식과 경험 수준이 높아서, 더 이상 농업기술센터가 지도를 하기 어려워졌다. 지도보다는 각종 첨단 기술서비스를 운용해야 하는 입장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원숙한 농촌지도사나 연구사의 역량은 강화될 것이다.


그런데, 내 눈에는 다양성과 변화 속도를 기존의 소통 방식으로도 한계에 처했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민간+공공'의 방식에 대한 고민에 다다르게 되고, 그것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고민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국제기관의 변화를 보았는데, 안타깝게도 실패에 가까운 결과를 보았었다. 왜 그랬을까.


결국 모든 과정은 연구개발 자원에 대한 공공부문의 지원 부족에 따라서, 그때서야 기관이 변화를 도모했다는 것이다. 미국을 포함한 선진국들이 왜 국제기관에 연구비를 주어야 하는 지를 설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과연 얼마나 세계 식량 문제의 발전에 '현재와 미래의 시각에서' 기여를 하며, 더 나아가 지원국가에도 이익을 줄 것인가.


그 자리를 메꿔준 민간 자본은 어떤 이유로 투자를 할까. 세계 평화와 식량 안보를 위해서? 물론 약간의 홍보나 기업 이미지 쇄신의 관점도 있겠으나, 가장 큰 부분은 면세와 보조금 등의 직접적 혜택을 누리는 동시에, 글로벌 시장 점유를 위한 사업 지속성, 더 나아가 '인적+유전자원 측면'의 무형/유형의 자원을 독점하기 위한 전략으로 그 결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와 같은 초기 선진 시장을 가진 나라로서 소비/가공 산업에 중점을 둔 나라 입장에서, 유전자원이나 생산 중심 국가에 대한 기술 수출과 공여 등에 따른 이익을 추구할 유인이 적다는 것이며, 그러한 생각은 비단 국제기관뿐만 아니라, 양자적 협약을 기반으로 한 협력에 있어서도 대동소이한 측면이 있을 것이다. 연구개발을 지원하느니, 그런 입장이라면 건물 지어주고 다리 놔주고, 유치원을 설립하거나, 고아원과 학교를 지어주는 것이 더 현실적으로 효과적인 것이다.


학자로서 안타까운 점은 이런 상황에 대한 자각에서 유래하였다. 하드웨어적 지원은 가능하지만, 지식 교류와 자원 교류 등 소프트웨어적 지원에 대한 공적 영역의 기여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미약해지고 있고, 그에 대한 민간 영역의 개입이 공적 영역 플랫폼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결국 개도국과 농업소국(우리나라, 일본 등 특수한 선진국)에게는 매우 불리하게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나 개인으로서의 자각은 다소 부정적인 결론에 다다르게 했으며, 그것이 국제기관을 떠나게 한 주요한 요인으로 작동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2010년대의 국제 정세에서 우리나라와 각 농업국제기관의 상황은 매우 다른 것이고, 그것은 작목에 관계없이 공통되고 일관적인 큰 고민이 되고 있다.


그런데, 다시 세상에 기후와 식량위기의 그늘이 드리워지고 있다. 1950년대의 국제 정세와 닮은 점도 또 다른 점도 있다. 여전히 세상에는 더 많은 식량이 필요하다는 닮은 점이 있으나, 식량 부족의 기원점이 좀 더 다르며, 그 해결 방법도 다를 것이다. 절대 강국이 없는 상황에서, 체제적 대립을 기반으로 한 과시적 국제 협력이 소멸되고, 각 국가와 지역국가별 이익을 대변하는 상황에서 지원 정책이 다변화되는 과정에서, 글로벌 기업의 영향력이 잠시나마 더 힘을 쓰고 있는 상황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좀 더 지나서 할 수 있을 것 같다.


농학자로서 이야기를 좀 해 보고 싶다. 식량 산업에 있어서, 농업은 매우 로컬 한 측면이 있는 반면에, 농학은 글로벌하다. 지식 체계는 글로벌하다는 의미다. 특히 요즘 같은 세상에서 지식은 금방 전파되고 공유된다. 따라서, 농학도 글로벌 경쟁력을 추구한다. 그런데, 그렇다 보니 농학 지식이 로컬 농업인들에게 효과가 무용해지는 추세를 가질 수 있다.


요즘 농과대학 교수를 채용할 때에도 국제적으로 명망이 있는 저널의 논문 게재수를 따지고 뽑기 때문에, 각 국가의 현실 산업에 대해서 무지한 상태로 남는 경우가 있다. 교수가 되어서도 계속적으로 연구비 수주를 위하여 국제학회 논문만 내야 한다. 농민은 그 논문을 거의 읽을 수도 없으며, 읽어도 별로 활용할 가치가 없다.


농업연구기관도 마찬가지다. 농진청도 국제 저널에 내면 더 평가를 잘 받는다. 그러나, 그것을 농민이 읽을 리도 없고, 그 기술이 국가적으로 독점적이지도 않다. 따라서, 농업인은 학문적 진보에 대하여 그리 높은 기대감을 갖지 않게 된다. 농업연구기관이라도 보다 실무적인 기여도를 높게 평가해야 한다.


학계는 농업의 기초기반 기술을 담당해야 하는데, 신분은 학자니 과학기술정보통신부나 교육부의 정책을 따라야 한다. 국제학회 저널 논문을 내야만 살아남는 구조다. 아마도 농학, 의약학, 공학 등은 이러한 부분에서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으로 안다. 따라서, 연구 재원을 다각화해야 하는데, 농업은 연구 용역을 줄 수 있는 기업이 거의 전무하여, 공적 자금에만 기대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이 상황이 지속된다. 대안으로써, 이러한 분야는 학교가 직접 어느 정도의 교내 연구비를 운영하도록 하여, 다양한 학문을 보조하도록 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의 재정이 너무 열악한 상태이니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학자 개인으로서는, 국제 학회 논문을 내더라도 우리나라 현실의 실증을 포함하여 논문에 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논문을 최근에 지속적으로 내고 있는데, 영어로 써야 하며 논문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져, 어쩔 수 없이 학내 홍보과를 통하여 소수 언론에 홍보를 하여 인터넷에 노출되도록 하는 방식을 취하곤 했다.


결국 나는 이런 생각에 이르렀다. 논문을 읽는 사람은 로컬 농민이 아니고 학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논문의 인용 횟수를 카운팅 하는 학계에서는 농민이 제아무리 좋아해도 논문의 질적 평가를 받을 수 없으니 그런 논문은 쓸 수가 없다. 그렇다면, 학자들이 자신의 연구를 실용적으로 의미가 있도록 할 수 있는 실증적 근거와 토론을 논문에 지속적으로 포함시켜서, 더 많은 학자들이 그런 논문을 쓰게 하면 되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실증적 데이터를 만드는데 너무 큰 비용이 든다. 따라서, 공공 연구시스템 개혁이 필요하며, 농학 관련 대학과 민간 연구소에 실증을 위한 연구비를 더 많이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지자체 농업진흥기관, 농업기술센터, 농민 기업, 농업인들이 클러스터를 이루어 실증적 데이터를 축적할 수 있는 하드웨어와 인력 제공 등을 해 주면 가능하지 않을까.


이렇게 하면, 국가기관, 지방 농업진흥기관, 대학, 농민/농기업(생산 분야)의 상생과 발전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모든 사람이 모든 일을 하는 현행 시스템은 그냥 모두 목표 없이 달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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