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상'과 '양식'의 주체와 객체로서
아내가 아침 일찍 학교에 갔다는 말을 들으니, 바로 드는 생각이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일을 하는 대신, 일찍 자. 아침에 일어나 걱정이 많아지니 그냥 일을 하는 것이 더 나아. 저녁의 걱정은 쓸모가 없고 몸을 지치게 하지."
어제저녁 늦게 미팅을 하였는데, 한국과 온라인으로 모처럼 귀한 저녁 시간을 공유해 주는 사람들을 붙잡고 말이 길어졌다. 꼭 온라인 '술자리'와 같은 느낌... 그러나, 우리 나이들이 밤늦게까지 무엇을 하면 좋은 것 같지는 않다.
사람이 책임을 직면하면, 자신의 본성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나의 본성은 뭘까. 보통은 책임을 잘 이행하기 위하여, 그 일을 잘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다양한 방식의 정당성을 부여하지만, 실은 나의 본성, 본질과 싸우는 중이다.
가령, '나는 사람을 중시한다'면, 그것이 내가 그 사람을 이용의 가치로 보는지, 아니면 관계의 가치로 보는 지에서 갈등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학생을 지도하더라도, 그것이 그 학생의 미래를 생각하는 것인지, 학문의 발전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나의 영달을 위한 것인지,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오게 된다.
같은 나잇대에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조금은 솔직해도 되고, 그러한 이야기에서 내 생각을 간접적으로 체크해 볼 수도 있지만, 역시 세대공감을 위한 별도의 나의 노력이 필요하다. 다짐에 다짐을 하는 것이, 어떻게 하면 내가 더 경청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한 장치를 만드는 것이다.
하나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어제 내 입에서 나왔던 이야기, 두 개의 것, '표상'과 '양식'이라고 했다. 과학기술 연구를 수행하는 대학 연구실에서의 문화가 무엇일까. 무엇을 표상으로 삼을까. 일본의 110년 역사의 연구실과 개인화되어 있는 우리나라 대학 연구실의 차이는 무엇일까.
우리 연구실은 교수 개인의 능력, 성취, 지향, 자세 등이 '표상'일 수밖에 없다. 내가 무엇을 말하고 보고 실천하고 성취하는가를 학생들이 지켜보고, 그것에 대하여 반응하는 것이다. 내가 진정 바라는 우리 연구실 학생들의 발전이 좋은 연구와 연구 업적을 쌓는 것이라면, 내가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어떤 고민을 하고 기록하고 축적하며 내용을 만들어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나의 문제라면, 다른 하나는 집단의 문제이고, 어떻게 그것을 구현하느냐 하는 문제인데, 간단히 '양식'이라고 해 보자. 표상을 구체화하는 양식은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내 하나의 제안으로, 무엇을 제한하고 무엇에 자유를 부여할까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했다.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생각해 보자. 연구실이 처음 구성되는 단계에서는 물건 하나 어디 놓는 것부터 다 결정해야 한다. 그때 참여한 연구원과 학생들은 모든 것을 바닥에서부터 생각해야 하며, 그 구성에 동참하기 때문에 '표상'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자신 스스로도 그 표상의 일부가 된다. 아이러니라면, 연구실의 성숙 단계에 들어서면 이 부분이 적잖이 문제가 된다. 개별 학생과 연구원이 각자의 생각을 강하게 들이대면서 연구 집단이 분리되고 정치화되기 때문이다.
우리 연구실은 그 경험을 두 번째 하고 있는 셈이다. 아니, 세 번째? 그 친구들이 가진 '표상'이 무엇일지는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 다행히 연구실 최소한의 규율, 생각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 최소한의 규율을 만들 시간적 여유가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원숙한 인생 경험을 가진 연구원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저널 클럽을 구성하고 그것을 수행하는 방법, 연구실 물건과 기구를 사용하고 원상태가 되게 하는 방법, 종자와 물질을 어떻게 다루고 그것을 외부와 연락할 때의 프로토콜, 농장과 연구실 시설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방법 등에 대해서는 매우 강한 규제로 하되, 그 남은 모든 소프트웨어적인 것은 자유롭게 방관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여기에서 나의 문제는 아직도 '탑다운적'이라는 것이다. 프로젝트 펀딩이 어떻다, 그 주제가 무엇이다, 너희 인건비는 그것에서 나오니 그것을 따르라, 그리고 남은 시간에 무엇을 해라... 그런데, '남는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남는 여유'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우리나라의 대학은 행정처리가 너무 많고, 심지어 학생들도 굉장히 많은 서류와 절차를 따라야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에 대한 지원은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홀로 살기'가 참 버겁다. 특히 한국인들은 친구와 가족의 눈치를 끊임없이 보게 되고, 외국인들은 상대적 차별과 시선, 불편을 느끼고 산다. 그것은 어느 나라나 있고 고민거리겠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나아지고 있느냐', 또는 그것을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것들과 비슷하게도 실천이 잘 안 되는 이유가, 곳곳에서 발생하는 미성숙한 커뮤니케이션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유독 문제가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내 경험으로는 개도국, 또는 전쟁 시 피지배 경험을 당한 사회와 문화에서 공통으로 여겨진다. 그 당시 교육 수혜자가 오히려 더 진보적 커뮤니케이션에 미숙한데, 그 이유는 정규교육 그 자체가 집단의 커뮤니케이션을 분리하는 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모처럼 소통의 관점이 바뀌고는 있으나, 이 또한 과거에 생각했던 근거를 바탕으로 한 노인들의 결정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진정한 소통을 하려면 환경의 변화를 반영하여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1960-70년대의 생각을 끌어다가 근거로 삼아 판단을 하는 것만큼 무지한 소통이 없을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나 또한 자유롭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진정한 '양식'은 어떻게 셋업 하게 될까.
나는 세 명의 연구원과 학생을 지명하고 우선 소통을 해 보기로 했다. 이 사람들은 학생들과 나 사이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판단을 중화하는 것이다. 전체에게 최소한 그러나 가장 절제 있는 규율을 결정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학생들을 발견하고 그 학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가장 최선일 지를 우선 의논해 보는 것이다. 이 일을 담당할 사람들은 과묵하고 성실하며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이어야 한다. (내가 성격이 직선적이고 드라이버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성격이 더 좋다).
올 6개월은 바로 이 최소한의 것을 만들어나가 보려고 한다. 문화가 형성되어 좋은 선후배들과 졸업생들을 확보하게 되는 연구팀은 그것이 세종대든, 다른 대학이든, 외국이든 상관없이 서로가 연대하여 학문의 깊이를 더할 것이고, 그 외연을 확장할 것이다. 그러한 문화를 가진 연구집단을 리드하는 것이 학자로서의 최대 영예요 감사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