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가스와 밥은 어떻게 함께 먹게 되었나 생각하다가
오늘 점심에 근처의 돈가스집에 갔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일본의 돈가스를 먹으면서, 어떻게 이것을 맨밥과 같이 먹을 수 있을까 생각을 하게 된다.
맨밥과 후라이드치킨을 먹는 필리핀 사람들을 볼 때에도 이상했었다. 우리 어린 시절에 맨밥과 튀김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쌀밥은 소위 '커플링'의 황제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많은 나라에서 쌀밥은 그 자체로 매우 많은 음식과 함께 먹는다. (또, 먹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쌀밥 자체가 없지는 않지만 강하지 않은 고유의 풍미와 단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아주 오묘한 수준의 독특한 flavor는 굉장히 넓은 스펙트럼의 커플링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의구심이 드는 것은 왜 우리나라에서는 튀김과 밥을 먹을 생각을 안 했을까? 가령 생각을 해 보면, 만약 튀김의 기름기가 너무 심하고 밥이 떡진 상태라면 굉장히 목 넘김이 나쁠 것이다. 먹는 게 고역인 셈이다. 이런 경험을 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런 식사 방법이 존재할 리가 없다.
그런데, 필리핀은 인디카를 먹으니 밥이 잘 뭉치지 않는다. 일본의 맨밥도 대부분 보슬보슬하다. '끈기'라 하더라도 밥알 자체의 모양을 유지하도록 하는 끈기냐, 아니면 밥알을 서로 뭉치게 하는 끈기냐 하는 것을 구분해야 하는데, 보통 떡을 만드는 찰기와 쌀알을 개별적으로 모양을 잘 유지하면서 탱글탱글하게 만드는 찰기는 실제 아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쌀밥의 관점에서 볼 때, 쌀이 밥이 되어 서로 잘 붙지 않는 이 특성은 고기나 기름진 음식의 풍미와 어떤 이유에서든 잘 맞았던 것이 아닐까. 결국, 이 '커플링'이라는 것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실제 그 음식 그 자체가 무엇이냐가 중요하다기보다는 그 음식의 특성이 더 중요한 것이다.
찰기에 대한 이해를 좀 더 세밀하게 구분하고 정량적으로 평가한 것이 유전적으로 구별될 수 있을 때, 이 돈가스와 잘 맞는 특성의 쌀을 정의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맨밥의 커플링 효과를 확장하고, 더 나아가 고기류가 많이 소비되더라도 그 효과가 쌀밥의 소비 감소를 줄이는 데 미치는 효과가 줄어들게 된다.
예전에 혹자는 밀가루 소비가 늘어서, 지금은 고기 소비가 늘어서, 그것과 매칭이 되는 식단의 변화가 오고, 과거 식단의 중심에 있던 쌀의 소비가 줄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런 설명이 아직도 완전히 납득되지 않는 이유는 쌀밥 소비가 줄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초중반부터 계속되었던 것이고, 그것이 꼭 우리의 식단이 이미 서구식이어서 그렇다고 설명하기에만은 한계가 있다.
한 번에 먹는 밥의 양을 줄어드는 것이 일관적이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쌀밥에 의존하는 칼로리의 비율을 줄였다는 의미도 되지만, 그것은 결과적인 의미에 더 가까울 것이다. 오히려 쌀밥과 커플링이 되지 않아도 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기회의 증가, 즉 간식의 증가에 기인하였을 확률이 크다.
쌀밥과 과자만큼이나 커플링이 어려운 음식도 없을 것 같다. 과자를 먹으면서 밥을 먹는 사람은 어느 문화에서도 본 적이 없다.
자, 그런데 돈가스는 안 그렇다. 그런데, 이 돈가스도 만약 과자처럼 엄청난 양의 설탕과 기름을 넣고, 튀기지 않고 구웠다면 이야기가 달랐을 것 같다. 고기에서 기름진 맛이 적당하지 않고 육즙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달랐을 것이다. 그리고, 쌀밥도 떡지고 서로 덩어리 진 다면 달랐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쌀밥 소비의 변화에 대한 좀 다른 관점을 돌아보게 했다. 여전히 음식을 그 종류에 맞추어서 단순화하는 것은 실체에 접근하는 사고를 어렵게 한다. 결국 이것도 어떤 식으로 음식을 조리하느냐 어떤 방식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포인트를 '정량적'으로 찾았느냐,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해야 하는 것에 생각이 미친다.
그리고 유독 그런 성공은 일본에서 많이 나타난다. 서로 맞지 않았을 것 같은 많은 음식 재료 간 궁합이 있는데, 쌀밥을 중심으로 보면, 튀김류가 그렇고 사실 날생선인 초밥도 그렇다. 조금만 잘못 만들거나 재료를 잘못 써도 정말 먹을 수 없는 수준의 음식이 되는 까다로움이 오히려 '음식 장인'을 만들어 내는 문화적 내러티브를 창생 하게 했다.
사실 쉽지 않은 조합이다 보니, 더 까다롭게 조리를 하게 되고, 재료의 신선도와 특성에 더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암묵지든 어떻든 도제식으로든 기록되었든 '전수'되었다.
왜 그것이 가능했을까. 전수가 되려면 수요가 있어야 하는데, 그 수요는 그 예민한 차이를 보고 단지 '아, 다르네' 정도가 아니라, '왜 다르지?'하고 질문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사회문화적으로 정착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작은 차이에 대해 질문하고 관심을 가지며, 그 작은 차이를 만드는 것에 대해 존중하는 자세, 결국 가치에 금전적인 지불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생활이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문화적 바탕은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일본 고유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관심을 갖고 수집하고 축적하고 기록하는 것은 서유럽의 문명이 먼저 했고, 그 이전에 아라비아인, 인도인, 중국인들이 먼저 했다. 중요한 것은 그 문명의 연속성이고 그것을 소화해 내는 보통 사람들의 교양의 수준이다.
모든 것은 글과 문자, 숫자로 전달되지 않는다. 음악, 미술, 심지어 무도의 형태로도 전달이 된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다 어느 정도의 예비된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음식은 그렇지 않다. 가장 적은 노력으로 소위 '입문'이 가능한데, 속된 말로 '돈 잘 벌어서 좋은 음식 먹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음식을 향유하기 위한 사전 훈련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음식을 통한 문화적 교양의 축적이 가장 빨랐을 수도 있다. 그것은 가장 종합적이면서도 가장 원초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회의 특성과 현상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소통창구로서도 음식은 중요하다.
다시 돈가스로 돌아와서, 이 돈가스를 먹으며, '아, 이 돈가스가 맛있다'라는 생각보다, '난 왜 이 쌀밥을 같이 먹을 수 있지?'라는 생각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농업 정책을 하는 입장에서는 쌀밥 소비량을 증가시키는 정책을 거의 포기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가장 이해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사회의 교양적 수준의 성숙도와 연관되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경제와 정책은 수치화되어야 관리가 가능한데, 이게 그 영역이 아니어서다.
이제 중요한 질문이 남았다. 그럼, 어떤 나라들(또는 문화)은 비슷한 상황에서, 이런 음식을 성공시키고 특성화시키고 명물로 만들어 내고, 어떤 문화는 그렇지 못할까? 결국, 내가 말할 수 있는 한 가지 관점은 그렇다.
재료를 욕하지 마라. 더 좋은 재료와 더 좋은 셰프와 그 뒤의 더 좋은 농민과 그 사람들을 돕는 시스템과 자연환경, 농업 기술이 있다. 그것을 알아주고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더 높은 가치를 계산해 주고 지불해 주는 데 있다.
돈가스와 쌀밥은 그래서 공생이 가능했을 것이고, 일본 도쿄 어느 집에서 시작된 돈가스가 세계적인 음식이 된 이유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