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사고가 확장되는 과정
요즘 AI 도구들과 이런저런 일을 해 보면서 느낀 점들이 있다. 나는 무엇에 대하여 의견을 내기 위하여, 그것에 푹 몰입하고 일단 그것을 전부 수용해 보려고 애쓰면서 일을 해 보는 경향이 있다.
새로운 연구 주제를 잡으면, 그 관련 논문 수백 편을 먼저 탐색하고 정리하는 것이 첫 번째 작업이고, 식물을 새로 다루게 되면 그것을 기르고 관찰하고 노트하는 것이 가장 처음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AI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코딩도 모르고 데이터베이스도 잘 모른다. 그러하니 당연히 내 생각은 철저하게 수요자 마인드다. 그런 사람의 눈에 AI의 성과물은 정말 놀랍다. 왜냐하면,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그 실체를 시뮬레이션해 주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은 그냥 외형은 아니다. 우리가 화장품을 사러 가면 뭘 사야 할지 모른다. 그러면 점원이 와서 '샘플 써 보세요' 하고 작은 것을 준다. 그것은 당장 몇 번의 기능을 하지만, 제대로 내 피부가 좋아지려면, 그 화장품을 꾸준히 써야 하고 정품을 사야 한다.
그러나, 시뮬레이션, 즉 샘플의 역할을 정말 크다. 그것은 두 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문으로서의 역할, 다른 하나는 거울로서의 역할이다. '문(gate)'로서의 역할이란, 나와 다른 세상으로 가는 통로가 되어준다는 말이다. 예전에 나에게 프로그래밍과 데이터베이스의 영역은 정말 높은 벽이었다.
심지어 나 또한 생물통계학 초급을 공부하고, 대학교 일반 수학도 공부하고, 약간의 공업수학도 이해는 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에 비하면 월등하게 이해 수준이 높을 것이다. 그런 나에게도 실제 프로의 영역은 넘사벽인 것이다. 물론 반대의 관점도 마찬가지다. 수없이 많은 AI 전문가들이 제아무리 부전공을 하여 생물과학이나 농업을 전공해도 그 깊은 영역을 다 담아내지 못했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렇게 전문화된 영역 간의 회의를 아마도 수천만 번쯤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오히려 그 간격은 더 커지고, 결국 실질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주 가끔 등장하는 천재들에 의해서 적당한 수준에서 정리될 뿐이었다. 우리는 몇 명의 천재를 기억하지만, 그들도 결국 물리학자, 수학자, 음악가, 건축가, 미술가 등 창작의 영역에서 볼 때, 여전히 이론가요, 여전히 내가 관심이 있는 농학의 영역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없었다. 아마 잘 몰랐을 것이다.
이렇게 거리가 먼 이유는 단지 지식의 부족이나 무관심에만 있지 않다. 정말로 모르는 것이었다. 각자의 영역이 너무 오래 따로 달려왔고, 그들만의 용어가 생기고 그들만 공유하는 암묵지가 있고, 또 그들끼리만 형성된 사회가 있다. 지식적으로 뿐만 아니라, 속칭 '융합'이란 꼬리표는 그냥 피상적인 구호에 불과했다. 이들은 논문 한 편 전통 저널에 내기 힘들다. 왜냐하면 리뷰어도 부족하다는 통상적인 변명과 함께, 실제로는 기존의 커뮤니티에 속하기가 어려워서다. 그렇게 실제 융합을 작동시키는 'gate', 즉, '문'이 없었다.
그런데, 이 문을 누가 만들고 열어야 할까. 나는 AI가 문을 만들어 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LLM이 나오면서 어찌 되었든 상대의 언어를 실시간적으로 추정과 추측의 논리 하에 전개만 하면, 결국 상당히 많은 부분 접근이 가능해졌다고 생각했다. 만약 사용자가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다면, 이런 방식의 접근이 보다 빠르게 초격차를 만들어낼 것이다.
한편으로 문은 누가 열까. 그것은 전통적 지식의 생산자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식의 소비자, 수요자 입장이 문을 열 수 있게 된 것이다. 수요자가 원하는 모습을 생산자에게 설명하는 데 들어간 시간, 노력, 비용과 그 수많은 무한 피드백의 과정에서 대부분 '괴물'이 만들어지고 좌절하는 게, 고급 지식 노동 세계의 일상이었다. 과학은 해답을 주지 못한다. 질문할 뿐이다. 그런데, 이 무한 질문의 과정에 AI의 피드백과 아울러, 그 피드백 자체의 모든 과정을 검토할 수 있도록 제시하므로, '그냥요', '어쩌다가요' 하는 수정 불가한 사람의 생각을 믿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두 번째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거울'의 이야기다. AI에게 그냥 툭 던진 척번째 질문은 보통 실망스러운 답변으로 돌아온다. 여기에서 대부분이 멈추고 화를 낸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나는 워낙 짓궂은 성격도 있지만, 남들이 보통 열광하면 왜 그럴까, 그 실체가 뭘까 하는 질문을 갖고 있다. 그래서 파본다. 왜 열광할까.
다행히 그 호기심이 첫 번째 질문이다. 그래서 이리저리 데리고 놀아본다. 남들의 경험을 들어본다. 그러다가 알게 된다. 내 질문이 이상했던 것을. 질문이 추상적이니 답변도 추상적인 것이다. 그러다가 알게 되었다. 내가 모르는 내 생각의 흐름이 있고, 그 생각의 단계들이 한 번도 기록되거나 리뷰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것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나는 학생들이 있으므로 계속 학생들에게 AI 사용 과정을 공유한다. 학생들에게는 미안하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겐 거의 유일한 '동기'이므로 어쩔 수 없다. 싫으면 중이 절을 떠나면 된다. 다행히도 일부 학생들은 내 진의를 파악했다. 그리고, 흉내내기 시작했다.
자, 질문을 할 때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부터 질문을 던진다. 질문 던지기가 참 어렵다. 그럼 6하원칙에 칸 메꾸기가 어렵다.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과학자들도 마찬가지고, 육종학자들은 더 하고, 말수가 적거나 내향적인 성격이면 더 안된다. 그래서 질문이 떠올랐다. "내가 처한 문제를 적으면 어떻게 질문을 하면 되는지 도와주는 앱을 만들어줘" 그렇게 시작한 것이다.
질문을 던지고 작동을 시키고 무엇이든 튀어나오면, 그다음에는 그 앱을 구동시킨 원리를 묻는다. 그리고 그것을 물어볼 때 쓴 내 프롬프트가 어떻게 개선되어야 하는 지를 묻는다. 그러면 프롬프트 개선안이 나온다. 플로우차트도 물어본다. 그러면 내 생각이 어디에서 점프를 했는지, 무슨 질문을 했어야 했는지를 추가로 알게 된다.
그렇게 해서 제법 많은 앱을 만들어 봤다. 우리 연구실 데이터를 조사한 엑셀 파일을 올려놓고, 그것을 막연히 어떤 분석을 해 보라고 하고, 그것을 데이터베이스처럼 해서 시뮬레이션해 보라고 하고. 그러면, 내가 어떤 것을 채워 넣어야 하는지가 보인다. 그다음에 그 시뮬레이션을 다시 해석하라고 하고, 학습용 자료로 만들라고 한다. 학생들이 어떤 것을 원할지 상상해 보면서.
그리고 그것을 리뷰해 보면, 내가 어떤 생각을 뛰어넘었는지, 그리고 무슨 생각을 안 하는지, 심지어 내가 어느 용어를 잘못 알고 있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날것으로 학생들과 공유한다.
한편 학생들에게 연구 프로포잘을 써 오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pdf로 만든 후, AI에 넣어서 비판 버전으로 작성하게 한다. 교수와 저널 리뷰어의 비판적 관점의 이야기는 날이 서있어 가슴이 아프다. 그런데, 그것을 오디오로 만들어 공유한다. 학생들에게 '거울'을 들어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실험 중이다. AI는 1인칭 자아인 '나'와 2인칭 '학생'과, 그리고 가끔 모두에게 공유하는 '그들'에게, 어떤 '거울'이 되어줄 것인가.
이 두 이야기는 사람을 만나는 이유와도 같다. 전혀 다른 속성의 전문가를 만나는 이유는 '문'을 찾기 위하여, 그리고 나를 돌아보는 '거울'을 보기 위해서다. 사람을 만나는 직접 만나는 것이 갖는 효과와 AI를 활용하여 얻는 효과는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연민'의 효과와 비언어적 소통의 효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시뮬레이션된 사회(디지털 사회)에서의 사회적 네트워크는 크게 변화하였다. 그리고 온라인에서의 경제 규모는 오프라인을 압도하였다. 이제는 오프라인의 자원을 희생하여 대대적으로 온라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과거에는 무시되었을 온라인 세계에서의 소통 구조가 오히려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일방 소통의 텔레비전은 쇠락하고 다방향 소통 시스템만이 살아남고 있다. 어떤 이는 AI가 사람들의 소통을 단절하고 극단화할 것이라고 했는데, 어쩌면 내 AI가 이미 다른 사람들의 AI를 통하여, '문'이 되고 '거울'이 되고 있을 것이다.
오늘 나는 내 연구 논문과 그에 포함된 유전자원, 형질, 유전자, 분자마커, 품종과 특허를 동적으로 연동하는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보라고 했고, 그것을 html로 만들었다. 시간은 한 4시간 걸렸다. 이 정도의 데이터베이스나 요구는 워낙 가벼운 것이니 현재의 AI로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규모의 오믹스 정보, 표현체 정보를 포함한 전문적인 생명정보 기반 육종 지원 시스템 같은 것은 이런 식으로 완전히 구축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세상 어디에나 소위 '수요공급의 법칙'과 '수확체감의 법칙'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너무 흔해지면 싸지고, 너무 과하게 투자하면 손해라는 것이다. 결국 나 같은 육종학자는 내 암묵지와 내가 가진 재료만 잘 설명하고 사회의 '비과학적' 논리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역할만 해 주는 소통 창구가 있으면 된다. 그것을 도와줄 최고 수준의 '정제된' 데이터는 전문가들이 알아서 만들어줄 영역인 것이다.
현재 나를 즐겁게 하는 AI의 요소를 이야기하라고 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전에는 멍청했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 질문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나만 알고 있을 것 같은 나의 내면의 생각의 과정을 체계화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라고 할 것이다.
난 보통 사람들이 현재보다 현저하게 똑똑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은 비단 자동차나 기차가 발명되어 달릴 때와 같은 국면에서 사회가 어느 길을 선택했느냐 하는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가 내리는 선택을 결정하는 그 사회구성원의 '총화'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역시 결국 시스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스템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글로벌', 그리고 '로컬'. '글로벌'이란 나를 포함한 거시적 관점의 시스템을 말한다. 이 시스템은 주로 카테고리, 수치화된 지표, 그리고 평균을 따른다. 절대적 기준보다는 표준화된 기준과 상대화된 서열값이나 수치를 기본으로 구성된다. 반면, '로컬'이란, 미시적인 컨트롤이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AI 시스템이 글로벌일 수밖에 없었다. 그 과학기술적, 경제적 이유에서 뿐만 아니라, 그 체계 자체에 대한 이해와 수요가 그것에 국한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나, 정보기술의 혁명적 변화는 그 변화의 주체를 점점 더 작게 만들었다. 세계적인 빅테크 기업도 결국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하는 '기술경영자'와 '기술정책가'의 역량에 달려 있고, 이들은 이미 초국가적이다. 한편, 그렇게 개발되고 있는 기술은 점점 더 우월한 개인이 성장과 발전이 지체된 기업이나 심지어 정부의 힘도 능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거창한 이야기는 제쳐두고 내 경험과 사고의 틀 안에 놓고 생각해 본다면, 이제는 좀 시시한 '유튜브'는 그만, 인간 또는 '인간-AI 결합 전문가' 시스템과 실시간적으로 또는 그에 비견하는 수준의 소통을 통하여, '문'과 '거울'의 메커니즘으로 엄청나게 빨리 진보할 수 있다. 예전에는 내 옆에 있는 사람과 소통을 해야 했다. 전문가들도 그렇다. 어쩔 수 없이 학과 내 교수, 또는 같은 그룹에 그들을 전문가로 영입해야만 기술 발전이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꼭 그래야만 할까?
내가 가진 질문에 대한 보다 정교한 질문을 찾기 위하여, 더 강력한 전문가를 직접 또는 그가 퍼뜨려 놓았을 만한 '전문가-AI 복합체'를 타기팅하여 소통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 지금의 과학기술 저널리즘은 이것에 대한 엄청난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꼭 최초의 카메라가 나오고 인터넷이 나오고 음란물이 판친 것처럼, 미디어 기술은 그 단계를 거친다. 사람의 가장 음흉한 부분에서 기존 미디어의 한계 때문에 누리지 못했던 것을 '보복적으로' 소비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이에 따라 시스템은 충실한 자본력으로 완성되어 나아간다.
어쩌면, 과학기술 저널리즘도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 AI가 글을 쓴 것을 판정할 수도 없고, 그것이 연구과정에 기술되기에도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하게 모든 단계에서 얽혀 있어서, 따로 떼어 설명하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이미 연구자와 함께 공생하고 있어서 떼어내면 연구자 집단이 죽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정직성과 성실성을 호소하는 것도 순진한 발상이다. 교수가 학생들에게 기본 소양을 지도할 수 있지만, 현실은?
나는 다양한 부분의 검토가 필요해졌다고 생각한다. 이제 '저자'는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나? 꼭 '저자'를 제한시켜야 하나? 논문이 학자의 명성을 빌드업해 왔는데, 그 기능이 오히려 너무 강조되었던 것이 아닌가? 학자에게 돈을 준 정부나 국민, 기업이 원했던 것은 논문만이 거의 유일한 학자들의 성취를 통해, 본래 목적물인 '사회적, 경제적 진보'를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때문이 아닌가? 저자들의 authority 대신에 학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다른 형태의 기여 방법은 없나?
맞다. 실제로 이미 젊은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보다 실질적 보상인 안정된 고용과 실질적 수익 실현이 연구개발의 초점이 되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논문뿐만 아니라 생성될 수 있는 수많은 연구 성과에 대해서 재검토가 필요한 시대가 온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 보면, 내가 공부하는 육종학의 실질적 목적은 '작물 개량을 통한 식물 생산성과 효용성을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육종학 최후의 산물은 '육종방법론의 개발'과 '육종 산물의 개발'이다. 그런데, 이 목표들은 전부 아이디어의 최말단에 있거나, 너무 (사람수 측면에서) 소수의 요구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인용수도 적고 커뮤니티도 적다. 그 어마어마하게 큰 사회경제적 임팩트에도 불구하고.
난 이것이 현대 식물육종학이 죽어가고 있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사라져 가는 것들이 있다. 기초학문 중에도 많이 있고, 인문사회학 중에도 많이 있다. 난 인용 횟수로 과학자들 사이에서 '유명인'이 되는 것이 학자의 고유한 평가지표요 숙명인가에 대해서 회의감을 갖는 사람 중에 한 명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현재의 '파괴적 혁신'은 나에게 일견 반가운 현상이다. 비록, 나조차도 나의 젊은 시절이 논문 개수와 인용 횟수, 그리고 품종과 특허 등 소위 '정상지표'를 위해 달려왔지만,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이 변화에 대해서 애증을 갖기보다는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지?'라면서 나름대로 본질을 캐고, 실제 자기 수준에서 정직하게 평가해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본래 학자의 수준은 축적된 지식의 크기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수없이 타락하고 퇴폐적으로 변모하는 학자들을 수없이 본다(나 자신도 두렵다). 그런데, 보통 그것을 방지하는 방법으로 인간들이 고안한 방법이 있다. 상호 리뷰와 비판, 그리고 다양한 직위와 명예의 단계다. 우리는 이러한 진화적인 시스템에서도 발견한다.
'지식의 크기와 학자의 수준은 아무 관계가 없다'.
심지어, 종종 그 학자의 소속이나 위치도 그 학자의 크기와 매칭이 잘 안 되는 경우(왜냐하면, 이미 나나 우리가 그 편견을 가지고 있으므로 - 학자 세계는 어떤 면에서 더 편견 덩어리다. 자기 전공의 창문으로만 세상을 보게 되면)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도, 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여전히 나는 그것을 정리하고 정제하고 '먹기 좋은 음식'으로 바꿔주는 존재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비슷한 다른 사람의 것들과 실시간 소통하면서 나보다 더 똑똑해져도 상관이 없다. 결국, 내가 내리는 '맞다'라는 말은 내가 '좋아한다'라고 수없이 치켜올리는 엄지손가락의 총합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