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관찰의 대상이 아니다

사람과 갈등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한 사람 이야기

by 진중현
SSI_20211020190041_V.jpg https://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211020601020


이런 내 생각이 위험한 생각일까?


인도 출신의 한 친구를 안다. 오늘 그 친구가 딸아이와 좋은 배경에서 사진을 올렸다.


그런데, 인도 쪽 사람들의 얼굴은 윤곽은 뚜렷한 반면, 이목구비가 파스텔톤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생각했다. 약간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내가 더 친숙하게 보는 사람들의 모습과는 좀 다른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사람에 대한 존중이라는 개념에 대한 리뷰를 하게 된다.


나와 더 다르게 생긴 사람들에 대한 애정 - 즉, 인류애 - 의 실체가 있을까? 사실 이 문제는 인류가 다투고 경쟁하고 전쟁하는 큰 이유 중 하나가 아닌가.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내 경험으로 나는 어느 민족 출신이나 잘 어울리는 것을 봐서, 나는 사람의 외양보다 그 사람의 생각이나 영혼의 맑음(?) 정도를 더 보는 것 같다. 이것을 어찌 아냐고? 나도 모른다. 나도 내가 어느 정도의 사람인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이 들뿐이다.


흔히들 '사람의 내면'이라고 표현하는데, 그것을 어찌 정량화하고 계측할 수 있을까? 그저 잘 맞는가 융합하는가의 차원이 더 맞는 생각일 것이다. 상대적인 것.


비교적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도, 그 사람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는가, 그 사람이 말하고 행동이 얼마나 일치하는가 - 즉, 예측 가능한가 - 의 여부가 나에게 더 안정감을 주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어떻게 생겼든, 어떤 성향의 사람이건 큰 문제는 안되었다. (나에게도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관용적으로 봐주었으면)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더 나와 닮았다고 생각되는 우리나라 사람들과 더 어렵게 지냈던 경험이 있다. 외면이 닮아도 내면이 더 다른 것을 더 쉽게 알아서였을 것이다. 언어의 역할이 컸다.


사람들이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외양을 가졌다는 것이 오히려 더 많은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더욱이 그들끼리는 내면의 언어를 읽어내는데 더 섬세해지고, 외양의 작은 차이에 차별을 하기 때문에, 그 갈등은 더 격렬할 수 있다.


서로 다른 국적의 종교의 문화의 사람들이 만나면, 외양의 차이가 큰 탓에 도리어 내면을 살펴서 공통점을 찾는 노력과 훈련만 되어 있다면, 도리어 더 깊은 관계의 친구들을 만들 수 있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그랬다. '사람은 과학적 관찰의 대상이 아닌 것 같다. 내가 그 사람이므로 늘 주관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알려고 하면 고통만 증대될 뿐이다.'


과학적 관찰의 대상은 사물이므로, 사람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고, 그에 대해 알려고 하면 할수록, 사람을 사물화 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고, 결국 사람이나 동물이나 사물에 대한 애정도 구별이 안 되는 모호함에 이르게 된다.


최근 교황이 반려동물에 대한 견해를 내었다. 반려동물 단체에서 반발을 한다고 하는데, 교황은 인간과 동물에 대한 애정에 차이를 두는 것을 시사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사람에 대한 애정과 동물과 사물에 대한 애정을 차이를 둘 것인가, 일치화할 것인가. 나는 반려동물에 대한 애정의 가치를 사람의 수준으로 올렸다고 보기보다, 사람에 대한 애정의 가치가 동물과 사물의 위치로 낮추어졌다고 본다. 교황은 그것을 지적한 것일지도.


학교 다닐 적에 '물신화'라는 용어를 배운 적이 있다. 사물을 오히려 신격화하는 것. 원시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어느 종교든 사물을 숭상하면 그것은 원시적으로 퇴보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이 돈이든, 권력이든, 대학입시 성공이든. 입으로 신을 숭상하지만, 실은 사물, 그리고 그 사물과 일치하게 되는 본인. 기독교가 비판을 받는 이유는 기독교의 물신화 성향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모든 문제는 내가 나를 포함한 인간 족속에 대한 가치혼란에서 기인한다. 그저 아침에 나와 닮은 그러나 다른 내 친구 가족의 사진을 보다가 떠오른 생각을 끄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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