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나는 희망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중이다
나는 무슨 강박이 좀 많은 것 같다. 무엇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그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망상도 있다. 그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떤 이에 대한 불온한 생각도 종종 떠오른다. 그것을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그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이런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연구를 할 때나 무엇인가 창작을 할 때에는 큰 도움이 되는 능력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불안감이 꿈에 나타날 때다.
종종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안다고 말하거나,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꿈을 꾼다. 말을 하면서도 그 불안감이 커지기 때문에 깨어나서 기분이 참 안 좋다.
반면, 현실세계에서는 장담을 안 하려고 많이 노력한다. 다양한 상상은 하되 그것을 결정할 때에는 최대한 보수적으로 노력하고, 계획적이지 않은 것을 반영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어떤 친구가 단지 괜히 부정적인 느낌을 준다고 까닭 없이 거리를 두었던 미안한 경험도 있고,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적도 많았다. 주관이 너무 강해서 좋은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이야기한 경우는 지금도 종종 있다.
요즘 MBTI가 유행이라는데, 자기가 자평하는 그런 테스트 가지고 본인을 몇 개의 카테고리에 넣는 것은 내 눈에 혈액형 성격론과 별 차이가 없다. 심리학적 근거가 있고 관찰에 의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조차도 그렇게 분명한 범주의 판단 근거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용하게도 사람들이 '당신 AB형이지?' 하는데, AB형 맞다. 그건 참 신기하다).
간혹 '당신 천재 같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일을 동시에 해내느냐' 그런 사람들도 만나봤다. 그런데, 내가 제일 듣기 싫은 말이 이런 말들이다. 초능력자 같은 수준의 진짜 천재도 주변에 많고, 엄청난 성과를 내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그 말을 듣기 싫어하는 이유는, 진심 어린 말로 들리지 않아서다.
다만, 어떤 일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가급적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끝까지 상상해 보는 경향이 있다. 최악과 최선을 다 생각해 본다. 대학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는 그것을 '궁극'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종종 나에게 지혜를 주는 요소로 작동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종종 재수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나 혼자 한참을 떠들게 만들며, 중간에 생기는 변수에 대하여 생각 못하고 설익은 결과에 만족하는 상황으로 나를 몰아가기도 했다.
이 훈련을 오래 하다가 보니, 척 보면 탁 아는 것들이 있고, 키워드 하나에 수십 개의 논문과 근거, 그리고 그 논리를 세우고, 두 시간은 너끈히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그런데, 그것은 천재성이 아니다. 나는 아내를 만나고 우리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내와 수없이 이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았다. 아내는 유아교육을 전공했고, 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헤아림이 큰 사람에 속하기 때문에, 내 나름의 교육관과 나 자신 스스로를 교육하는 것에 대해 많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적어도 나는 조금 나은 수준이라는 정도의 자부심은 있다.
아내와 내 아이들은 듣는 귀가 발달되어 있고, 핵심을 잘 찌른다. 말을 아주 효율적으로 한다. 크게 배운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백치미까지 느낄 정도다(사실 그게 호감을 느끼게 하는 최고의 요소인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데, 내가 이야기를 해 가면서, 나의 질문을 만들고, 상대방의 무지함을 은근히 즐기면서, 그 무지함에서 무언가를 일깨우려는 (못된?) 마음이 기어오른다. 그리고 질문을 던지면, 보통 내 아내는 헛방이다(아니, 그것을 설사 알아맞히더라도 나는 금세 그 질문의 의도가 다른 것임을 설명하는 재주가 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내가 두 마디를 하기 힘들게 탁월한 짧은 답을 더 자주 던진다.
정말 신기했다.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 돌아보니 난 제도권 교육에서 문제풀이 훈련이나 열심히 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래서 4개의 보기를 내고 그 안에 답이 있다고 확신하며, 그것을 벗어나면 궤변을 내어 문제를 합리화하고 수긍하는 훈련이 수없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답이 있다는 가정도 하지 않는 열린 질문에 익숙하다. 내가 숨겨놓은 복병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열린 질문이 교육되어 있는 사람에게 단순 훈련이 된 사람은 적수가 못 되다.
애들이 성인이 되니 내 넋두리가 는다. 나의 강박은 내 위에서 내려온 유전이다. 그리고 내 어린 시절 태교부터 시작된 경쟁 중심의 문화이고 meme이다. 그 넋두리를 묵묵히 들어주는 아이들, 그 아이들은 나에게 시선으로 지혜와 평화를 준다. 내가 잘한 것이 있다면, 내 아내와 아이들의 그러한 열린 사고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나의 강박이 나를 죽이지 않도록, 내 경직된 두뇌를 이완시켜 주는 것에 감사하고, 내가 나이를 먹더라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가족에게 감사한다.
만 49세, 우리 나이로 50세. 난 지혜로운 멍청이가 될 수 있을까.
우리 가족들은 내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기대도 하지 않는다. 더욱이 내 친구들은 내가 어떻게 살든 떠나지 않고 옆에서 그런 나와 함께 잘 어울려 산다. 좀 알 것 같다. 그들도 내가 제법 희망적인 사람인 것을 알아주는 것일까. 결국 스스로 고민하다가 발견하면서 성장할 것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