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eIAnqMEDB30
케니 로저스의 음악은 가만히 자리에 앉아 들으면, 연속극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특히 이 노래는 그렇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일본 드라마를 보고 있다. '중쇄를 찍자'를 보고 나서, 추천을 따라 몇 개의 일본 드라마를 짬짬이 보고 있다.
세상을 사는 작은 사람들의 노력 노력으로 사는 이야기. 우리가 흔히 느끼는 좌절들에서 어떻게 나아갈까 하는 과정을 (약간의 교훈 조도 있지만) 무리 없이 끌고 간다.
어차피 우리는 이미지의 세상에 산다. 목숨을 걸기도 하는 애국 애족 종교도 이미지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삶도 이미지다. 나의 실존은 이미지에 묻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오히려 세상을 잘 아는 것이 아니라, 내가 구축한 이미지의 성 안에 자신을 가두고 편안함을 느낀다. 그 이미지의 성을 통해 세상을 보고, '나는 잘 살았어!' 그런다. 그 순간부터 천천히 죽어가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차피 딱히 방법도 없고, 굳이 그것을 부정할 필요도 없어서, 그렇게 이미지 안에 내 열정과 정신은 먹혀 들어간다.
그렇게 '벤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
계절은 낮과 밤의 길이에 따라, 춘분-하지-추분-동지가 있다. 우리 삶도 육체적 생명과 죽음 사이에서 계절이 있다. 스페인 아트록 그룹 Los Canarios는 비발디의 사계를 인생의 4단계에 비유하였다.
나의 인생 단계는 추분에 이르렀다. 열정과 소심함 사이에서 '과거에는 할까 말까 하면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점점 '하지 말자'가 되어 가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못하고, 말다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동지에 이르러 삶은 끝날 것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내 존재 안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 '하지' 때였다. 온통 밝고 환했으니까. 세상이 더 어려웠더라도 그때의 기억은 아름답게 빛날 수밖에 없다. 내 기억 속에는 그렇게 이미지화되어 기록된다.
내 옆의 아내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그녀의 23세쯤의 모습이다. 이미 반백이 되어가는 나이여도 내 안에는 그녀의 하지 춘분과 하지 사이의 어디쯤이 떠오른다.
내 아들과 딸아이를 떠올리자면, 평촌 어딘가의 분수대에서 뛰어놀던 5살과 2살 때의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내 안에 있는 두 아이는 항상 그 이미지로 남아 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살아 있는 두 아이일까, 아니다. 내 사랑은 그 이미지고, 그들은 그 이미지의 연장으로 내 눈앞에 있다.
사랑조차도 그렇게 이미지에 박제되어 있다.
그렇게 많은 이미지들이 나의 음반 컬렉션에, 책 속의 메모에, 구글 캘린더에 박제되어 있다.
어렸을 적 학교 운동장에 앉아 내 이름을 끄적여 본 적이 있다. 이름을 끄적이고 다시 읽어 보았다. 나의 이름이 생소했다. 내가 지은 이름도 아니거니와 나와 내 이름은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내 이름을 부르니 남을 부르는 것 같았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부르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내가 돌아보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한 온전한 서비스다라고. 내 것이 아니지만, 그 사람이 내 것이라고 믿으니 그렇게 해 주는 것이라고. 묘하게도 온전히 내 것이 아닌 것을 위해 서비스를 하는 것이 번거롭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
케니 로저스는 세상에 없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내가 이렇게 많은 생각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의 음악은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이미지의 연관성은 논리적인 것과 다르다. 이미지는 각자의 인생에 각인된 다른 언어일지도 모른다. 그냥 우리는 각각 실제로는 다른 이미지를 기억하지만, 사회라는 곳에서 배우는 어떤 '공통화'의 기작으로 인해 주파수를 맞추고 대충 이해하고 사는 것이리라 생각하곤 한다.
언어 때문에 우리가 서로를 잘 이해하는 것 같지만, 실은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언어 때문에 더 많은 분쟁을 한다. 언론과 학교는 언제나 진리를 전달하는데 실패하고, 말과 글로 하는 전략은 수많은 왜곡을 가져온다.
아마 훌륭한 소설가와 시인은 나보다 더 잘 알 것이다. 작가는 언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고 싶어 하는 존재일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왜 그러지 않았는가. 조각은 원래 그 돌 안에 있었다고. 조각가는 작품을 탈출시켰을 뿐이라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연장하여 세상을 본다. 케니 로저스의 음악을 듣고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운다. 그리고 누군가는 한숨을 쉬고 누군가는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지금의 나처럼 누군가는 수많은 이미지를 떠올리고 애써서 그 이미지들이 부디 좋은 의미였을 것으로 기억하고 싶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