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벼 품종 개발 회사, ' 라이스젠'의 창업자를 회고하며
이것은 특별한 닭갈비다.
나의 인생 중 20여 년의 시간을 떠오르게 하는 닭갈비다. 그 이유는 내 인생을 흔들어 놓은 어느 한 사람의 아내에게서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아내와 규원이 함께 앉아, 맛있게 요리된 닭갈비를 먹으면서, 누구의 선물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청평은 정말 아름답구나! 풍경사진이라도 찍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아내와 아침 일찍 일어나 가평군 청평면에 16년 만에 가 보게 되었다. 청평역도 새로 지어졌고, 그 옆에 있는 교회와 어린이집, 그리고 형수님의 집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살아났다.
나는 대학원 시절에 우리 연구실에서 갓 박사를 졸업한 차** 박사와 대화도 잘 되는 후배였다. 차박사는 벼와 쌀, 그리고 연구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은사님도 교수에 부임한 지 몇 년 안된 터라, 학생 한 명 한 명이 다 귀했을 것이다. 내 기억에 차박사는 대학원생 시절, 선생님을 흡족하게 하는 열정적인 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내의 기억으로 비추어 볼 때,) 머리는 반쯤 벗겨졌고 안경을 썼으며 건장한 체구의, (나와 동료들의 기억으로는) 이해 못 할 정도로 항상 밝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연구의 길을 걷도록 안내한 분이 은사님이시라면, 내가 대학원을 졸업하도록 한 사람은 차박사일 수도 있다. 박사를 따도 늘 호칭은 당연히 '형'이었다. 형은 학위를 따고 외국에 포닥을 갈 수도 있었겠으나, 연구실에서 개발한 벼 품종으로 사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주식으로 약간의 돈을 벌어, 형수님의 고향인 청평에 둥지를 틀고, 지금은 사라진 '라이스젠'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였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벼 육종회사이다. 쌀눈이 큰 품종인 '서농6호'와 '서농8호'를 실용화, 사업화하였다.
회사를 설립하면 연구원이 필요한 법, 내가 연구원으로 등재되어도 되냐고 하였고, 그렇게 (거의 명의상) 참여하고, 약간의 지분도 투자하였다. 그렇게 연을 맺었다.
차박사는 늘 나에게 '미래 사업의 동반자'라고 하였다. 나도 우리나라 식량작물 분야의 민간영역 확장이 중요하다는 데 동감하였다. 그토록 열정적인 사람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 크리스마스이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한 시간 동안 형의 이야기를 들었다. 회사 내 지위 확보를 위해 지분 방어에 대한 도움 요청에 관한 건이었다. '형, 정말 어려우면 나에게 전화해!'라고 했었는데, 정말 전화가 왔다.
난 나의 말을 지켰다. 6억 원 정도의 돈을 투자할 투자자를 모았고, 투자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차박사는 늘 2주일 정도마다 일정하게 학교를 들려 은사님과 의논을 한다 했다. 그날은 추웠고 길에 살얼음이 있었다. 오기로 한 날보다 하루 일찍 집에서 일찍 출발했다고 한다.
그렇게 화장터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형을 지켜보게 되었다. 나는 울지 못했다. 너무 죄송했고 미안했다. 내가 괜한 희망을 주어서 너무 소중한 것과 바꿨다고 했다. 그 자리에 투자하기로 했던 외삼촌께서도 눈물이 고이셨다. 나는 은사님과 외삼촌의 눈물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정말 많이 울었다. 그런데 죄인이 된 나는 겉으로 울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떠날 수도 없었다. 형수님과 이제 어린아이들을 어떻게...
그 회사는 '신지'가 되었고, 나는 그 회사의 기술이사가 되어, 안성의 고삼농협과 협업하여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몇 년 동안의 고군분투에서 높은 매출을 올릴 수도 있었으나, 경영자 간의 불화로 결국 문을 닫았다.
내 지분에는 형수님과 아이들의 지분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 것은 물론 그분들의 것도 지키지 못했다. 정말 못난 놈이었다. 나는 그것이 내 인생의 큰 빚이었다. 그런데 나는 정말 무능했다.
어제 형수님을 만나 그 말을 했다. '착하게 살려면 능력이 뛰어나야 해요.' 지극히도 착하디 착한 형수님, 정말 아이들을 멋있고 밝게 키우셨다. 그 아이들은 내 조카들, 난 평생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내년 형님의 기일에 불러달라고 했다.
이미 형수님의 꿈속에 형님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가끔 나타나면 늘 실험하고 농장과 연구실을 오가는 모습만 보인다고 했다. 형수님이 그러셨다. '왜 저리 하나님과 인류애가 넘치는 사람을 먼저 데려가시고, 나같이 무능한 자를 남기셨는가'.
내 입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을 평가하는 게 아니고, 한 명 한 명과의 관계와 진심을 보실 것입니다. 형님의 삶과 형수님의 삶은 아무 관계가 없어요.'라고 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아쉬운 작별의 시간이 되었다. 차로 집에 모셔다 드리면서 길을 가는데, 동반했던 아내가 눈이 안 좋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형수님은 길을 가면서, 형님과의 추억을 하나하나 이야기하신다. '저 건물은 회사가 잘 되면 사고 싶어 했어요'. 난 그 건물을 두 번 세 번 돌아보게 되었다. 형님은 보기보다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구나. 건물은 동화 속에서나 나올만한 디자인에 소박한 모양이었다.
닭갈비를 먹으면서, 이야기를 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는 딸아이가 언젠가 나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남겨 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나의 인생에 차박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국제벼연구소에 간 것도 벼 품종 개발 회사를 만들고 운영한 것도 차박사와의 대화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가끔 어려울 때면 차박사가 떠오르고 그의 열정적인 삶이 생각난다. 차박사의 말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차박사는 몸으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공교롭게도 나와 마음을 주고받았던 사람들의 임종을 여러 번 경험하였는데, 어려울 때마다 그들이 나를 보고 있고, 나의 성공을 도와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꿈과 열정이 강하면, 죽어서도 남겨진 자들을 위할 수도 있다고 막연히 경험하고 느낀다.
그래서 이토록 어려운 생에서 포기하고 싶은 수많은 시간을 견디고 갈 수 있다. 나의 아내와 결혼한 지, 23년이 되었구나. 종종 차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 왔던 터라, 아내에게 물어보는 것으로 저녁 식탁에서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당신의 기억은 어떻게 남아있는지 듣고 싶어. '
규원이는 열심히 들어줬다. 얼굴을 계속 보는데 너무나 감사했다. 내가 살아서 딸아이와 이렇게 식사를 하고 함께 얼굴을 보고. 아내를 보고 있고. 한편 형수님이 아닌 형님이 떠올랐다. 형수님과 아이들의 기억이 아닌 하늘에 가 있는 형님의 기억은 이런 것일까.
형수님께 고백을 했다. '저는 죄책감이 컸어요. 형님이 저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했죠.' 형수님은 말씀을 못했다. 나도 말을 못 이었다. 그 말은 내가 종종 형수님과 가족들을 만날 때 미안해하지 않기를 바라고 한 말이었다.
착한 아내가 말해 줬다. '우리가 찾아뵙고 가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형수님은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시는 것 같다. 우리 모두 반백년을 살고, 얼굴과 눈동자가 그것을 말해 준다. 아이들이 모두 대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되었다. 형수님은 이제 세상의 변화에 많이 놀라시는 것 같다. '한번 우리와 함께 일해 보시는 것은 어때요?'
형수님은 가평을 떠나지 못하실 것 같다. 부모님을 사랑하고 가평을 사랑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며 교육하는 것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계신 분이다. 그리고 더 이상 청평 거리거리에 남아있는 수많은 형님과의 기억이 더 이상 괴롭지 않으신 것 같다.
'운전은 하세요?'
'중고차를 몰았는데, 다 망가지고 나서는 차 살 돈이 없고... 그런데, 처음에 어쩔 수 없이 차를 몰 때, 트럭들을 볼 때마다 놀라곤 했어요.'
형수님의 트라우마를 예상은 했건만, 그것을 극복하신지는 얼마 안 되신 것 같다. 그래도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함께 있어서 좋았고, 공동체가 형수님과 가족들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버팀목이 된 것이 오히려 부러웠다.
나는 아직 멀었다. 형수님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고 아름다운 분이다. 형님은 늘 그 자리에서 있었고, 형수님은 가끔씩 형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꿋꿋이 그리고 멋있게 나이 드셨다.
정말 아름다운 사람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차박사는 죽어서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멋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지금도 제2의, 제3의 '라이스젠'을 돕고 있다. 그들이 성공하길 바라고 있다. 그 꿈은 계속될 것이고, 그것은 결국 다가오는 많은 위기에서 우리에게 진정한 기회를 줄 것이다. 식량과 자원의 위기에 대하여 생각할 때, 이름 없는 사람들의 눈물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를 사람들이 기억하게 하고 싶다.
* 북한강 청평역 남이섬과 자라섬 주변에 그렇게 많은 닭갈비 집이 있는지 몰랐다. 어느 집을 선택해야 할지 모를 정도다. 가장 맛있는 닭갈비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먹는 닭갈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