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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과 벼 품종을 연구한다는 것

by 진중현


사진첩을 정리하다가 나온 사진이다. 내 얼굴이 잘 나오지 않아 다행이다. 2016년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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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논의 모양을 볼 때, 곡성의 미실란에서 이동현 대표와 협업을 할 때 찍은 사진 같다.


당시, 친환경 농법에 우리가 개발한 기후변화 대응 품종들이 어떤지가 궁금해서 평가하고 싶었고, 유색미와 찰벼 등 다양한 재료들을 길러서 가공적성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곡성은 좀 멀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거리가 있으니, 그곳에 가서 섬세하게 살피지 못하였고, 미실란의 이동현 대표도 이미 많은 업무가 있었다.


관찰과 조사가 생명인 것이 육종인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다시 방향이 잡힐 때까지 쉬어 가기로 했다.


함께 하는 마음은 절실했지만, 사람도 부족하고 체력도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벼농사는 우리 문화의 근간인데, 농업 정책에서 바라보면, 메탄가스 발생시키는 산업이 되어 버렸다. 쌀은 남는다 하고 탄수화물 섭취 과잉이 건강을 해친다고들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벼농사에 최적인 환경을 가지고 있다. 기후와 토질도 그러하고, 오래된 벼농사 이력 때문에 사회문화, 정서, 산업 시스템까지 아주 뿌리 깊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유일하게 생산량을 극대화시킨 거의 전단계에 걸쳐 노동력과 비용이 최적화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벼를 바라보자면, 시골에 남겨진 노모와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세상은 변하고 있다. 벼, 밀, 옥수수, 수수, 기장, 귀리, 심지어 테프나 돌피, 강피까지 죄다 식량작물은 거의 다 벼과 식물이다. 그래서 벼 연구는 인류의 식량 연구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던 Norman Borlaug 박사는 '왜 벼는 다른 벼과 식물과 달리 녹병에 걸리지 않느냐'는 질문을 후대에 남겼다. 식량에 대한 연구에서 그만큼 벼 연구는 중요하다. 벼 연구는 벼를 뛰어넘어 모든 식량에 대한 연구가 된다.


식량의 근간은 풀이다. 고기를 먹는다고 해도 그 고기를 만드는 소나 돼지도 결국 풀과 곡식을 먹는다. 그래서 식량이라고 할 때, 축산을 고려하지 않고, 식량작물과 사료작물로 환원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식량작물을 바라보면 짠할 때가 있다. 벼가 우리를 먹이느라 고생한다. 그런데, 벼는 우리에게 먹히면서 가장 번성한 작물이다. 우리가 애써 기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땀을 먹고 자라는 벼가 우리에게 먹힌다. 우리는 벼의 노예다.


남는 곡물은 우리 인간의 수를 급격하게 늘렸는데, 그렇게 늘어난 인구를 먹이기 위해 더 많이 노동해야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이러니한 상태이다. 쌀도 남고 식량도 남는데, 인구가 줄어든다.


벼는 그래서 천덕꾸러기가 되었나 싶다. 실제로 식량이 남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 땅에서만 나는 것을 먹지 않고, 모두가 부유해지니 외국에서 사다 먹기 때문이다. 실은 우리 땅에서 나는 것으로 20% 정도만 먹는 데 말이다. 다른 작물들이 왕성하게 자라기에는 참 어렵다. 기후도 땅도 산업체계도 사회도 문화도 잘 안 맞다. 그래서 쌀이 그 20%를 거의 다 해 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착각한다. 쌀이 남는다고 식량이 남는 줄 안다.


식량이 남는다고 틀린 말이고, 쌀이 남는다고 틀린 말이다. 우리가 쌀을 외국에서 의무 수입하는 양을 제하고 나면 남지 않는다. 국제 정세와 정책에 따라 언제든지 우리는 어느 식량작물도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 된다. 쌀이 아닌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쌀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심 비슷한 관점도 문제고, 쌀이 식량의 전부인 줄 착각하는 관점도 문제다. 한쪽에서는 쌀이 전부인 듯 생각하고, 다른 쪽에서는 쌀을 외면한다.


설날과 추석이 되면 잠시 시골의 노모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모도 결국 죽고 그러한 기억들이 조금씩 사라져 간다.


우리의 복장이 변해가고 생활 방식이 변하듯, 우리의 식생활도 변하고, 더불어 쌀도 밥도 변했다. 시골에 가야 할 이유가 줄어들고, 시골길에 흔하게 보이던 논도 줄어든다.


반듯하게 정리가 잘 되었던 논에 잡초가 무성하다. 병충해가 창궐했다는 이유로 품종이 갈아치워진다. 너무 많이 생산되고 인기가 많은 것이 이유가 되어 퇴출되어 버리는 세상에서, 여전히 어떤 좋은 벼를 개발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 그래야 할까. 도대체 2030년이, 2050년이, 아니 2100년이 어떤 세상이길래, 우리는 계속 그것을 준비해야 할까.


우리는 그런 존재다. 하루에 몇 번이나 가족의 얼굴을 떠올리고, 그들에 대한 사랑을 생각할까. 어떤 이들에게는 2100년이 너무 먼 미래일 수도 있다. 그러나, 품종을 개발하는 사람들에게 2100년은 너무 가깝다.


기후변화 예측에 따르면, 2030년의 탄소저감 목표는 이미 달성하기 어려운 지경이며, 지질학적으로 가장 따뜻했던 때에 지구 대부분이 바다에 잠기던 시절보다 앞으로 더 따뜻한 세상이 올 수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논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저 수많은 표찰에 딸린 다양한 벼 중에서 제발 우리를 구원할 종자가 나오길 바라는 소박한 마음으로 진흙 속에 발을 담그는 것이다.


다행히 그런 뜻에 함께 하는 소수의 학생들과 연구원들에게 늘 감사한다. 가끔 외롭다. 세상이 너무나 쉽게 우리를 외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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