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빅쇼트, 돈룩업에서 읽은 농업

by 진중현


354584777_10162804037969112_4645930819531118691_n.jpg?stp=dst-jpg_p180x540&_nc_cat=108&ccb=1-7&_nc_sid=730e14&_nc_ohc=yTOXm25Gc0YAX91qUy-&_nc_ht=scontent-ssn1-1.xx&oh=00_AfCcnfer_PeYj6p3Y0Zfd9w4EgPEHDhhQFmB5klDneg4Tw&oe=649E3870

두 개의 영화는 공통점이 있다.


세상을 망하게 할 만한 큰 사건이 있다는 사실을 관찰과 계산을 통해 , 그것을 먼저 발견한 사람들이 각별한 의지로 세상에 그 사실을 알리지만, 많은 사람들이 결국 파국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참 익숙하다. 당장에 성경의 세례 요한부터가 그랬고 다. 어쩌면, 우리 역사는 계속적인 위기를 경고하는 소수와 그와 무관한 방관자들, 그리고 결국은 맞이하게 되는 비극, 또 그것을 활용해 승승장구하는 소수의 이야기라는 큰 맥락이 있을 것이다.


Big Short에서, 사람들을 멍청하거나 무지하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단기적으로 결정하는 것에 문제의식을 제기할 따름이다. 난 그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왜 우리는 이토록 무심할까, 왜 그리고 무정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나름의 합리적인 대답이었던 것이다.


한편, 위기를 편하게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놀라운 방법이 있다. 그것은 개별적인 리스크를 끌어다가 모아서 평균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을 적절하게 그룹화하면, 더 안정적인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로 구분되고, 그에 따라 적절하게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뜻 듣기에 합리적으로 보이고, 일반 시민부터 정치가, 금융가, 투자가에게 모두 이익이 될 것 같았던 이 놀라운 체계는 하나하나 무너져 갈 수밖에 없는 체계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놀라운 엄청난 규모의 사기극이 가능한 것은 탐욕에 도취된 집단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영화에서 보여준다. 우리 옆에 저 정도의 파국조차도 무수하게 존재한다.


354576581_10162804038414112_7945111304710930362_n.jpg?stp=dst-jpg_p180x540&_nc_cat=100&ccb=1-7&_nc_sid=730e14&_nc_ohc=f6_m3FRKg8wAX8jmq7G&_nc_ht=scontent-ssn1-1.xx&oh=00_AfCOwIrENG4IY72fErkCHS8XMTwnOsc31Wwm_IBCLWDm9A&oe=649E6E7B


왜 이 두 영화를 끄집어 생각해 내었을까.


Black Mirror의 Loch Henry 편이나, 허영만 화백의 '이끼' 같은 영화, 심지어, '구타유발자들' 같은 영화에서 나는 시골의 이면을 보았다. 시골에는 중요한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면에서 극단적이고 고립된 다양성을 보여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도시가 더 평균적이고 온화하지 않은가?



AAAABWPLpw0tRL22gAAilITN5fQ7lY68pBzbtc-VkbEM2S4KNfP8Ud3FnyfBYxoT05Foyoxp1c_E0LY-nRuE7v8Xyk3k0KPyZboDNTK1.jpg?r=eff

영화들은 그 어두운 면을 끄집어내었다. 세계는 이례적으로 도시화가 가속되었다. 시골은 아주 단순한 몇 가지 이유만으로도 쉽게 고립되어 버린다. 그냥 새로운 도로가 나거나, 어떤 불미스러운 사건 하나만 터져도 전체가 확 죽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고립된 사람들은 무기력하게 살아간다.


우리 농촌이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한탄의 소리가 들린다. 농촌에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아야 할 이유는 너무나 많지만, 그 이유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차라리 10평 내외의 도시 그것도 서울 생활을 하려는 이유를 우리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몇 가지 질문을 해 보자.


1.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Money , Fame and Power를 드러내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사회라면?


2. 왜 후회하는가. 생산자의 삶을 벗어나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되었다면?


3. 목적이 수단을 합리화한다면? 결과와 서열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고, 제도가 각 개인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질문을 공개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냥 목구멍에서 삼킬 뿐. 몇몇 작은 목소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라져 갔다.


농촌에 기반을 둔 농업도, 그 주체였던 농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소멸될 기세다. 그것을 다독이는 정책은 온정주의 측면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기술과 아이디어를 앞장 세워 새로운 길을 터 보려는 노력들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시스템에서 좌절하고 돌아선다.


언제까지 농업 정책이 복지 정책의 틀을 못 벗어날 것인가. 우리는 무역 중심 국가 아니었나? 영국도 EU 탈퇴를 하자마자 식량 가격이 폭등하고 식량 안보에 빨간등이 켜졌다고 한다. 쌀가격은 계속 높이고 채소 가격 등은 계속 낮추는 정책은 아이러니하게도 국내 농업 생산 기술력을 하락시키고 국제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약화된 농업에 대한 처방은 지원 정책 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정책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단기적으로 보아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Big Short의 영화 대사와 같은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Mark Baum과 같이 끝까지 사람들을 각성시키는 인물이나 그 안에서 최상의 기회를 만들어 가는 Michael Burry와 같은 인물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가 임박했을 때 가장 힘들 것이다. 아니, 심지어 그때가 왔어도 몇 초 동안 사람들의 비난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식문화, 식량안보, 종자, 육종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