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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지 Jun 20. 2020

마음을 보관하는 냉동고

냉동고가 이상한 비닐 덩어리로 가득 찬 이유

세월이 빠르게 지나면서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다양한 냉동식품들이 출시되고 있다. 집에서 굽기만 하면 되는 냉동생지 빵, 냉동피자, 냉동 볶음밥.. 이런 냉동식품들을 보관할 수 있는 냉동고는 혁신이라 할 정도로 우리 생활에 편리함을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우리 집 냉동고를 열어 정리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닐에 둘러싸인 식품으로 가득했다는 것이다. 우리 냉동고엔 맛있고 편리한 냉동식품 대신 왜 비닐에 둘러싸인 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한 것일까?


명절을 쇠고 3일간 텅 비어있던 집에 들어서자마자 하는 일은 냉동고를 열고 할머니가 싸주신 떡과 데친 나물들을 넣어두는 것이다. 3일 내내 질릴 정도로 먹었는데도 남은 음식들은 분명 한동안 안 먹을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제사를 지내는 날에는 전과 생선이 냉동고로 들어간다. 이렇듯이 할머니 댁에 다녀오는 길엔 양손이 무거울 정도로 음식을 싸들고 와 냉장고와 냉동고에 넣기 바쁘다. 며칠간은 장을 보지 않아도 먹을 게 넘쳐난다는 행복감에 빠져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존재를 잊어버리고 삼겹살, 해산물을 사다가 새로운 재료들로 식탁을 꾸린다. 그렇게 냉동고에는 차곡차곡 할머니가 싸주신 음식들로 쌓이게 되는 것이다.




분기별로 돌아오는 냉장고 정리시간에 아빠는 옆에서 “아니, 아직도 이게 있었단 말이야?”하고는 오래 보관된 음식들은 쓰레기통으로 보내버린다. 웬만해서 안 먹는 것은 그냥 다 버리라는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아까워서 버리는 것을 잘하지 못하는 엄마와 나는 꾸역꾸역 다시 냉동고에 집어넣는다. 이렇게 버려지지 않은 음식들은 냉장고 정리를 한 후 며칠간 따뜻하게 데워져 식탁에 올라가지만 또 시간이 지나면 잊히고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게 된다.


음식을 안 먹고 버리는 일을 수년간 반복하다 보니 엄마는 웬만해서 할머니 댁에서 음식을 잘 가져오려 하지 않는다. 집에 갈 준비를 할 때쯤엔 아주 사소한 논쟁이 펼쳐진다. 할머니는 주섬주섬 비닐봉지를 가져와 음식을 나누어 담고, 엄마는 가져가면 먹지도 않는다며 내 것은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다. 직접 찧어 만든 인절미와 매작과, 공들여 키운 상추, 가지, 고추 같은 각종 야채들을 잔뜩 준비해둔 할머니는 애써 서운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시고 혼자서 다 먹지도 못한다며 가져다 먹으라는 말 한마디에 엄마는 어쩔 수 없이 몇 가지 집어 든다.


나는 그 마음을 커가면서 깨달았다. 자식들에게 주는 기쁨이 할머니에겐 행복이고, 아픈 몸을 이끌고 할머니가 애써 준비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버리는 엄마의 마음도 편치 않을 거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닐에 둘러 싸인 것을 ‘마음’이라 부르기로 했다.


냉동고는 그 마음이 담긴 음식을 보관해주는 공간이 되었다. 여전히 우리 집 냉동고 안은 냉동식품으로 태어난 음식보다는 ‘마음’이 담긴 음식들로 가득 차 있다. 할머니에겐 우리들 입에 당신 손으로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 그래서 그 마음을 나는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다. 냉동고가 가득 차더라도!




각자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집에서 밥을 먹는 일이 줄어들자 엄마가 평소에 해둔 음식들도 자칫 상할 만한 음식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나중에 까먹기 일쑤다. 이미 냉장고 안에서 상해버린 음식을 버릴 때마다 “다신 음식 안 해줘야지”하는 엄마의 굳은 마음가짐이 느껴진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해준 음식을 상하기 전에 다 뱃속에 넣는 일이 미션이 되었다. 그렇게 한바탕 잘 먹고 나면 엄마는 점점 더 손이 커져서 음식은 늘어나고 배가 꺼질 틈이 없게 된다. 언젠가 분명 나에게 엄마도 할머니처럼 음식을 바리바리 싸줄 거라고 확신한다. 물론 엄마도 부정하진 않았다. 나중엔 엄마의 마음을 거절하고 싶지도 않고 소소한 행복을 지켜드리기 위해 결혼하면 냉동고의 용량이 큰 것으로 장만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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