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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지 Jun 21. 2020

1년을 뒤흔드는 3일간의 김장

식탁의 중심, 김치를 만드는 날

“이번 주 주말에 김장하러 간다”

우리 집안의 큰 행사가 다가왔다. 11월 말이나 12월 초가 되면 언제나 그렇듯 비장한 마음으로 김장을 할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 집 김장은 꼬박 2박 3일이 걸린다. 할머니 집 마당에서 키운 배추를 뽑아내고 소금에 하루를 절인 다음 깨끗이 씻어내고 평상에 비닐을 깔고 차곡차곡 쌓아 물기를 뺀다. 우리 집안에서 생각하는 김치 맛의 비결은 1년 내내 먹을 맛있는 김치를 위해 재료를 아끼지 않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우리 식구의 1년 음식 맛을 무너뜨리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꼭두새벽부터 양념소를 만들기 위해 장작을 때서 가마솥에 멸치, 건새우, 다포리, 각종 야채를 넣고 육수를 내고 마늘, 생강, 각종 젓갈을 아낌없이 넣는다. 물론 김치에 사용하는 소금도 이모집 창고에서 수년간 적절한 온도와 습도에서 보관된 완벽한 재료다.


모든 준비가 되면 온 가족이 모여 할머니 댁의 마당에서 큰 고무대야를 뒤집어 세우고 넓은 쟁반을 깐 다음, 각자 앞치마와 고무장갑을 끼고 은색 테이프를 둘둘 감아 흘러내리지 않게 고정시킨다. 그리고는 배추 나르기, 김장통 정리하기, 배추 버무리기 등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한다. 온 가족이 모여서 하다 보니 버무리는 것은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고 중간중간 김장통을 정리하는 파트는 푹 삶은 수육과 싱싱한 굴을 감싼 김치를 차례대로 입에 넣어준다. 따뜻한 수육과 김치가 만날 때와 차가운 굴과 김치가 만날 때 입 안의 온도는 다르지만 감탄사의 온도는 똑같다. 부드러운 식감과 아삭한 김치의 조합은 상상만 해도 행복해지는 궁합이다.





공교롭게도 나는 지금 이국땅에서 김치를 만든다. 젓갈이 맛을 좌우한다는 신념이 가득한 지역적 특색 때문에 젓갈이 없다면 김치를 만들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있던 나는 젓갈 없이도 김치가 맛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외국인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야 하다 보니 마늘과 생강 이외에 딱히 깊은 맛을 내는 건 들어가지 않는다. 육수를 내고 비싼 젓갈을 듬뿍 넣고 고추를 직접 말려 빻아 만든 김치에 익숙해진 나는 처음에 충격을 감출 수 없었다.


이 곳에서 먹는 김치가 익숙해진 작년 11월 말, 이번 해도 김장을 무사히 마쳤다는 엄마의 연락을 받았다.

“이번 김치도 너무 맛있어~ 수육 남은 거 가져와서 이제 저녁 먹는다! 김치 좀 보내줄까? 근데 가다가 익어버리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진짜 보내주지도 않을 거면서 희망고문을 하는 엄마다. 


엄마의 전화 한 통에 갓 만든 생김치의 맛이 떠올라 집에서 김치를 담그기로 결심했다. 아시아마트에서 배추를 사고 4시간을 절여 쌀풀을 쑤어 양념장을 만들었다. 한쪽에서 수육을 삶아 함께 먹는 갓 담근 김치는 한국에서 먹던 그 맛과 비슷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익을수록 괴상 해지는 맛 때문에 결국 김치는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원인을 생각해보면 소금이 부족해서 덜 절여진 배추였다. 그동안 김치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양념의 맛이라고 생각했는데, 배추 상태, 절여진 정도에 따라 맛이 크게 변할 수 있다고 깨달았다. 매번 일정하게 맛있는 김치를 만들어내는 비결은 재료도 있지만 꼬박 3일이 걸리는 긴 시간 때문이었을까.


3일간의 김장을 마치고 나온 그 김치는 1년 내내 우리 가족 식탁 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다. ‘3일 투자 1년 행복.’ 보장된 행복이다! 한국에 돌아가면 시원한 김치에 엄마가 해준 밥을 먹을 것이다. 3일의 시간이 담긴 김치에 빨리 길들여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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