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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지 Jun 25. 2020

마음에서 바이러스를 몰아내다.

코로나를 만난 워킹홀리데이 이야기


봄을 기다리며

캐리어 절반을 채우더라도 꼭 챙겨야 했던 전기장판과 롱패딩. 더블린에 도착하자마자 전기장판 없이는 잠을 못 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롱패딩을 꺼내 6개월 내내 입고 다녔다. 6개월이 지나 날씨가 따뜻해질 때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 닥친 것이다. 결과적으로 지금 이곳을 떠나지 않고 살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한 가지는 ‘날씨’였다. 따뜻한 봄과 선선한 여름을 기다리며 세차게 부는 비바람이 얼굴을 사정없이 때려도 꿋꿋이 버텨냈다. 또 다른 결정적 이유는 오자마자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유명한 곳이나 국내 여행은 다 ‘날씨가 좋아지면’이라는 전제하에 다 미뤄두었다는 사실이다. 집에서 20분 거리의 유명한 스폿도 8개월이 지나도록 못 가다가 최근에서야 가볼 수 있었다.



2킬로 이동제한, 버스 안에서 경찰에게 검문당하다.

코로나 확진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아일랜드 정부는 강력한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 반드시 집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 심지어 자가에서도 모든 공적, 사적인 회동을 금지하고 커뮤니티 센터를 폐쇄했다.

   - 필수적인 보건, 사회보장 또는 여타 필수적인 서비스를 위한 직장 출퇴근
   - 식품 구매 혹은 음식을 받기 위한 목적
   - 진료예약, 의약품 혹인 건강 관련 물품을 받기 위한 목적
   - 어린이, 노약자 등을 돌보기 위한 가족 방문
   - 자가로부터 2킬로미터 이내 거리에서 짧은 운동
   - 식품생산 혹은 동물 관리 등의 농장 관리


그러나 한국음식을 사려면 2킬로 밖으로 나가야 했던지라 주말을 이용해 필요한 물건만 잠시 사 오기로 했다. 빠르게 다녀오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든든히 장을 본 후에 다시 버스에 올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버스가 신호대기 중인 틈을 타 갑자기 경찰 한 명이 버스에 탔고,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나에게 물었다.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이야?


두근두근하는 마음을 숨기고 장바구니를 보여주며 아시아마트에서 식료품을 사서 집에 가는 길이라고 얼버무렸다. (물론 사실이긴 하지만 집주소까지 대라고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답을 듣고는 다행히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승객 모두에게 확인하고 나서야 경찰은 버스에서 내렸다.



마음을 옥죄는 바이러스 속에서 만난 탈출구

만날 수 있는 사람도, 일할 곳도, 의지할 수 있는 곳도 없는 상황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일기를 쓰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시기가 들어맞게도 매일 글쓰기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났고, 나에 대해 깊게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도 가졌다. 별 탈 없이 집에서 머무를 수 있는 나의 상황을 감사하며 받아들이며 사소한 것에 감사하기로 다짐했다. 바이러스와 함께하는 나의 워킹홀리데이 생활의 목표는 3가지다.

1. 시간 :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몇 개월은 내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2. 기록: 나에게 집중한 시간 동안 들었던 생각을 기록하는 것은 미래의 표지판이자 나의 역사가 된다.
3. 건강: 건강하지 않으면 나도 없다. (feat. 쩌리초이님)

처음 목표로 했던 여행, 경험, 영어는 물 건너갔지만 바이러스 덕분에 인생의 진정한 목표를 얻었다. 어쩌면 지금 이 시기에 바이러스를 만난 건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 운명을 터닝 포인트로 만들어가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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