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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지 May 26. 2020

아빠와 함께했던, 함께할 제주

사랑하는 아빠와 함께했던 세 번의 제주도

제주를 처음 만나다

제주도를 떠올리면 아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빠는 화물차로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우유를 육지로 운반하는 일을 하셨는데,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되던 해 아빠는 우리 가족을 제주도로 초대하셨다. 우리 가족 4명은 아빠가 운전하고 다니시는 화물차에 모여타서 목포 여객터미널에 도착한 후 그대로 배에 올랐다. 제주에 가는 5시간 내내 동생과 함께 이렇게 큰 배 안에는 뭐가 있는지 휘젓고 다니면서 구경하고 먹느라 잠은커녕 배 안에서 지나가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한참을 쳐다보았던 인상 깊은 장면은 배가 지나간 자리에 남아있는 하얀 거품 길이었다. 내가 지나왔던 길이 파란 바다에 흔적이 남는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렇게 아빠가 만나게 해 준 나의 첫 제주는 시작부터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다. 아빠는 나에게 제주를 선물해 주었다.


아빠와 함께했던 제주, 두 번째

2014년 2월 한겨울. 방학이었던 나와 마침 일정이 비어있던 아빠는 즉흥적으로 한라산 등반을 하기로 했다. 일주일 뒤의 비행기를 예매하고 등산장비를 주위에서 빌려 아이젠과 등산스틱을 준비했다. 코스는 관음사-성판악으로 오르막길은 경사가 굴곡지고 험난하지만 내려올 땐 아주 편하게 내려올 수 있는 코스였다. 


아침 7시부터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비가 온 탓인지 바닥은 온통 진흙밭이었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백록담을 보게 된다는 설렘에 아빠와 나는 폴짝폴짝 뛰어다녔던 기억이 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힘들어서 기어 다니고 허리춤만큼 오는 눈밭에 빠져 허우적 대기도 했지만 아빠와 키득대며 올라가는 순간이 너무 재미있었다. 한 발짝만 잘못 헛디뎌도 낭떠러지인 등산길에서 미끄러져 등산스틱을 하나 놓쳐버리고 목숨을 잃을 뻔했다며 징징대는 나에게 아빠는 계속 나를 놀려댔지만 아빠의 뒷모습만 쫓아가던 나를 보던 아빠는 항상 멀리서 나를 바라보며 기다려주셨다.

 ‘20대가 체력은 나보다 못하다며’ 그 말은 왜 해!


고도가 높아질수록 반짝이는 설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 광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라고 연신 말하며 눈에 담기 바빴다. 나는 아빠가 이렇게 계속 감탄하는 모습을 처음 보고 나서 앞으로 아빠와 함께 한라산의 사계절을 같이 보리라 다짐했다.

정상에 도착했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백록담이었다. 몇 장의 기념사진을 찍고 각자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근처에 앉아 허기진 배를 채우기로 했다. 힘겹게 메고 온 가방이 드디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왔다. 나는 가방에서 컵라면과 김밥을(가벼운 것), 아빠는 보온병을(무거운 것) 꺼냈다. 아 꿀맛이다!


그러나 역시 아빠는 막걸리를 안 가져온 게 후회가 된다고 하신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동안 내내 우리는 한라산을 벌써 그리워하고 아쉬워했다. 그리고 꼭 다시 오자고 다짐했다. 남은 일정을 소화하고, 제주도에서 내가 기억하는 가장 따뜻했던 아빠와의 저녁식사를 고등어 회와 함께했다. 정말 오기 잘했다는 아빠의 한마디와 행복한 얼굴에 너무 뿌듯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빠와 함께했던 제주, 세 번째

2018년 2월. 나의 졸업 여행에 아빠를 초대했다. 일주일 넘는 시간의 제주 여행 동안 절반은 혼자, 절반은 아빠와 함께 했다. 혼자 여행을 마치고 공항으로 마중 나가 아빠를 기다리며 지난번 함께 올랐던 한라산이 떠올랐다. 그 경험이 ‘아빠를 기다리는 시간’을 새롭고 고마운 감정으로 다가오게 만들었다. 


딱히 세워둔 계획은 없었다. 생각나는 대로 지도를 찾아서 가고 싶은 곳을 다니고 지치면 숙소에서 쉬었다. 그리고는 성산일출봉 바로 앞에 숙소를 잡아서 다음날 일출을 보기로 했다. 한라산에 비하면 별거 아닌 오르막 길이었지만 지난 시간 동안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았던 아빠는 오래 걸어 다니면 힘들어하셨다. 내가 아빠의 속도에 맞춰서 차근차근 올라가면서 그때처럼 다시 백록담을 함께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오르막길을 올라가던 때 내가 기억하는 아빠의 모습은 대부분 뒷모습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먼저 올라 아빠를 기다리고 있자니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 아빠와 한라산이 아니어도 제주에서든 집에서든 아빠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졌다.


이번 저녁도 고등어 회와 함께 했다. 지난번과 다르게 나는 운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4년 전의 제주를 떠올리면서 따뜻한 저녁시간을 함께 보냈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아빠와 함께했던 제주여행 후에 내가 쓴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23일 성산, 오늘 하루 아빠와 반나절도 있지 않았지만 좋다. 행복하다. 뿌듯하다 등 좋은 단어들만 튀어나온 하루였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지만 이 순간이 영원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 아빠의 속마음은 아직 완전히 공감하고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런 날이 올 때 내가 옆에서 아빠를 위로하고 공감해줄 수 있기를.

25일 제주 마지막 밤, 6일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좋았다. 그저 좋기만 했다. 4년 전 한라산 때처럼 아빠와 두고두고 떠올릴 추억들이 많이 담겼다. 서두르지 않고, 그때그때 생각나는 것들을 하면서 하나도 모자람이 없이 넘치기만 했다.


다음 제주여행에서 이 글을 사랑하는 아빠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 지금처럼 아빠와 함께한 제주도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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