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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지 Jun 17. 2020

코펜하겐에서 배운 삶의 지혜 ‘휘게’

코펜하겐에서 2020년 새해를 맞이하다

“이번 2020년 새해 어디서 맞이할 거야? 런던 아니면 파리?”

”나는 코펜하겐!”

”덴마크..? 이번에 거기도 큰 축제 열리나 봐?”

“아니? 거기 별거 없어.... 휘게 문화 체험하러 가는 거야”


휘게(Hygge): 편안함, 따뜻함, 아늑함, 안락함을 뜻하는 덴마크어, 노르웨이어 명사이다.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또는 혼자서 보내는 소박하고 여유로운 시간, 일상 속의 소소한 즐거움이나 안락한 환경에서 오는 행복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나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고 현재 아일랜드에서 거주 중이다. 마음만 먹으면 유럽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지리적 환경 덕에 연말이 다가올수록 친구들은 새해를 맞이할 준비로 비행기 표를 끊고 계획을 세우기에 바빴다. 나 또한 2주간의 홀리데이를 받고 어디를 갈지 한창 행복한 고민에 빠져있었다. 런던아이에서 열리는 불꽃축제, 파리 개선문과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열리는 성대한 행사들을 뒤로하고 내가 선택한 곳은 코펜하겐. 언제 다시 유럽에서 새해를 맞이할지는 모르지만, 단순히 휘게 문화가 궁금해서 나는 이번 연말연초를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보내기로 했다.


휘게를 위한 완벽한(?) 계획

북유럽답게 하늘은 매우 맑았다. 코펜하겐의 공항은 시내와 많이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만만치 않은 교통비에 이것이 북유럽의 물가 인가하고 시작부터 제대로 느꼈다. 이번 휘게 문화 체험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준비물은 '돈'. 그동안의 1주일 숙박비를 합쳐도 모자라는 돈을 앞으로 3일 머무를 에어비앤비에 지출했다. 내가 생각한 휘게의 첫 번째 조건은 ‘아늑한 집’이었기 때문에. 휘게에 어울릴만한 집을 고르기 위해 에어비앤비에 ‘휘게’라는 단어를 검색해서 찾아냈을 정도로 열의는 대단했다. 처음에 마음에 들었던 집은 아니었지만 가격과 퀄리티 사이에서 적당한 합의를 하고 골랐던 숙소는 생각보다 아늑하고, 따뜻했다.


휘게의 두 번째 조건 ‘음식’

코펜하겐의 시내 정중앙은 2시간 안에 다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덴마크의 연말은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 조용했다. 한국의 연말은 이른바 ‘특수’라며 모든 식당들이나 카페, 술집은 24시간 불이 켜져 있고 친구나 연인과 함께 밖에서 북적대며 지내는 문화가 대부분이지만, 덴마크의 연말은 거의 모든 상점이 문이 닫혀있고 길거리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결국 아무것도 밖에서 할 수 없었던 우리는 마트에서 장을 보고 숙소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마트마저 ‘영업중지’라는 팻말만 붙어있을 뿐. 우리는 하는 수 없이 편의점에서 간단한 주전부리와 맥주를 사서 들어갔다.


다행스럽게도 어제 장을 봐 둔 음식들을 활용해서 식탁을 한상 차려낼 수 있었다. 12월 31일 저녁. 2019년을 보냄과 동시에 2020년 새해를 덴마크에서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에 우리는 들떠 있었다. 12시가 다가오길 기다리면서 차려둔 음식과 술을 마시고 이야기하면서 휘게의 포인트는 ‘촛불’이었는데 그걸 놓쳤다며 아쉬워했다. 이 시간을 보내면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과연 나는 휘게를 즐기고 있나? 계획된 휘게도 휘게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아늑한 집, 맛있는 음식, 함께 있는 사람 3박자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촛불을 놓쳤다며 아쉬워하는 게 진정한 휘게의 의미일까?


휘게의 마지막 조건이자 단 하나의 조건, ‘사랑하는 사람’

사실, 이번 휘게 찾기 여행은 혼자 계획했었다. 그러다 운이 좋게도 영국에서 유학 중인 사촌언니가 극적으로 합류하게 되었고 프라하에서부터 덴마크에 있는 3일 동안 언니와 함께 다닐 수 있었다. 2주간의 여행 동안 절반은 혼자 보냈었는데, 물론 혼자만의 시간이 좋았던 적도 있지만 함께했던 시간 동안 내가 더 많이 웃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외국생활 중 가장 그리웠던 것 중 하나는 가족들과 함께하는 식사시간이었다. 아무리 맛있는 걸 먹더라도 작은 방 안에서 혼자 먹는 밥은 같이 먹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며 이야기하고, 맛있게 먹고 난 후 앉거나 누워 같이 시간을 보냈던 그때가 매우 그립다고 느꼈을 때, 나는 '휘게'를 엉뚱한 데서 찾고 있었다고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그리움이 나를 덴마크로 이끌고 온 건 아닐까?

이번에 내가 깨달은 휘게의 유일한 조건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진정한 휘게가 무엇인지 찾고자 비싼 북유럽 물가를 감수하고 나섰다. (결국 비싼 물가를 견디지 못해 마지막은 짜장 불닭볶음면으로 끼니를 해결했지만... ) 그러나 우리는 일상에서 각자의 휘게를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 순간의 행복을 자각하고 감사해한다면, 휘게는 일상이 된다. 휘게를 찾아 떠나는 게 아니라 지금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커피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는 행위가 우리들 가까이에 이미 존재한다. 우리 일상 속에서 휘게를 끄집어내 보는 것은 어떨까.


PS. 덴마크의 새해 문화 중 하나는 개인이 폭죽을 터트리는 것인데, 이런 문화는 한 해 동안 안 좋았던 것들은 모두 날려버리고 새 출발을 하자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날 해가 지기 전부터 여기저기서 총소리처럼 뭔가  쿵쿵 터지는 소리가 났는데, 12시가 되는 순간에 마치 전쟁이 난 것처럼 사방 간 데서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난생 그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폭죽이 집 안까지 들어올듯한 전쟁 같은 난리통 속에서 우리는 이런 경험을 다해본다며 깔깔 웃어댔다. 다음날 아침, 길마다 놓여있는 많은 폭죽의 잔해들을 보면서 새해를 굉장히 스펙터클 하게 맞이 하는 그들의 문화를 느낄 수 있었다. 기존에 생각하던 편하고 안정적인 휘게 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다 같이 모여 새해를 맞이하고 폭죽을 터트리는 그들만의 휘게라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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