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xx Oct 13. 2016

자전거 탄 소년

방황하는 소년에게, 손을 내민다는 것

※스포주의!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 주의!


대학교를 다니며 몇 안되게 좋아했던 수업 중 들었던 말이 있다. 

"삶의 파편 하나하나가 삶 전체 의미와 등가를 이루고 있다"

안톤 체호프의 작품세계를 설명하시며 교수님이 해주신 말이다. 이 문장을 들었을 때 심장을 울렸던 느낌을 아직도 기억한다. 나에겐 소중했던 강의여서 종종 필기노트를 펼쳐보는데 다르덴 형제의 작품 '자전거 탄 소년'을 보고 저 강의의 안톤 체호프가 다시 생각나서 노트를 뒤져보았다.

이 영화를 보며 생각했다. 나는 어떤 삶의 파편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있게 했을까



누군가로부터 도망치려는 아이 시릴의 모습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정말 필사적이다. 잡혀가는 순간에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협상을 하고, 결국 잡힐지라도 다시 도망갈 기회만을 엿본다. 이 모습은 흡사 포획을 피해 도망치는 야생동물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아이의 모습은 명확하다. 날 것의 어떤 것 

시릴이 이토록 온 힘을 다해 도망치는 이유는 아버지이다. 보육원의 직원들을 피해 도망치면서 시릴이 요구하는 것은 아빠를 만나게 해달라는 것이다. 아빠는 날 찾으러 온다고 말했고, 보육원에 이렇게 날 오래 둘 사람이 아니라는 것 

아빠를 찾기 위해 전에 살던 아파트까지 찾아간 시릴은 그곳에서 보육원 직원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사만다'를 끌어안았다. 난처해진 보육원 직원은 절대 안 된다던 아빠의 집으로 안내해 주겠다며 협상을 시도하고 그 이야길 듣고 사만다를 놓아주는 시릴.

전부터 프랑스 영화를 볼 때면 프랑스 영화 특유의 무엇이 있다는 생각이 들곤했었다. 이전까지는 몰랐던 이유를 자전거 탄 소년을 보면서 이해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필요 없는 서사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편집점들이 뚝뚝 끊어지는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그래서 오히려 더 영화가 깔끔하게 느껴졌다. 사만다가 시릴을 위탁하는 과정들을 굳이 보여주기보다는 어느새 같이 생활하는 시릴과 사만다를 보여준다. 또한 감정을 끌어올릴만한 장면으로 넘어가기 전 장면 전환을 해 관객을 좀 더 절제시키는 느낌이라고 할까  하지만 이 영화는 직접적으로 감동과 눈물을 강요하는 장면 없이도 눈물을 쏟게 만드는 영화였고, 이런 면에서 내가 프랑스 영화에 느껴왔던 그 특유의 무엇을 찾게 되었다. 내가 너무나 익숙하게 접해 왔던 국내 영화들과는 달랐기 때문이라는 것. 감정의 홍수인 국내 영화 속에서 살다 이런 영화를 보니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다. 하지만 오히려 더 감정이 격해지게 만드는 마법. 

 

캐릭터들마저 감정의 직접적인 노출을 최대한 자제한다.  영화 속에서 시릴은 잘 웃지도 울지도 않는다. 내내 무표정할 뿐이다. 오히려 아이러닉 하게도 감정을 보이지 않는 캐릭터들을 보며 내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냥 시릴의 행동 하나하나에 눈물이 나왔다. 첫 장면에서 나왔듯이 시릴은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신체적인 저항을 한다. 어린 시릴이 할 수 있는 신체적 저항은 최대한의 힘을 발휘해 도망치는 것뿐이지만 말이다. 또한 최대한 힘을 발휘해 도망치는 신체적 저항과 반대로 시릴은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꼼짝하지 않는다.  

시릴의 성격을 알 수 있게 만드는 장치는 자전거이다. 시릴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전거를  도둑맞는 장면이 나온다. 시릴은 자전거를 도둑맞을 때마다 보육원에서 도망칠 때의 모습으로 자전거 도둑을 끝까지 쫓아간다. 도둑을 넘어뜨리던 팔을 깨물던 반드시 자전거를 되찾아오고야 만다. 시릴의 모습은 어느 한 군데 필사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쩐지 이게 아무 데도 의지 할 곳 없는 아이가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발버둥 같아서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런 시릴에게 선뜻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은 '사만다'이다. 아빠가 살았던 아파트의 일층 병원에서 보육원 직원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그 여자다. 사만다는 시릴에게 아이의 상황에 동정을 표하며 친절하게 대한다거나 소위 말하는 모성애를 보여주는 모습 따위 없다. 왜 자신이냐며 묻던 시릴에게 잠시의 침묵 후 사만다는 말한다.

"네가 날 필요로 했으니까"

병원에서 자신에게 매달렸던 시릴에게 무엇인가를 느껴서일까 시릴의 옆에 나무처럼 있어주는 사람은 시릴이 그토록 원하던 아빠가 아닌 사만다였다. 

나무 같은 사람이라는 말이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시릴이 아빠를 만나고, 더 이상 아빠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감당 안 되는 감정을 표출할 때도, 동네의 건달과 어울리기 위해 자신을 상처 내도, 범죄를 저질러 만만치 않은 액수의 금액을 합의금으로 내고 남자 친구와 헤어지면서까지 사만다는 시릴의 옆에 있어준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저렇게 감당하기 어려운 사고만 치는 시릴옆에 끝까지 있어주는 이유는 뭘까  

이렇게 묻는다면 사만다는 말할 것이다. 

"그 아이가 날 필요로 하니까.

 그리고 나도 그 아이가 필요해" 

 

시릴의 모습은 방황하는 어린 새 같기도 하고 날카로운 새끼 야생고양이 같기도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저 작은 아이의 밤톨 같은 머리를 사만다처럼 안아주고 싶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고 흔들리기만 할 것 같은 시릴은 없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시릴은 나무처럼 자신의 옆에 있어준 사만다에게 간다. 시릴의 자전거를 가져가고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위협을 가한 소년을 지나쳐 쩔뚝거리며 다시 자전거를 타고 사만다에게 간다. 위태로웠던 시릴의 모든 행동들이 자전거를 탄 그 뒷모습에서는 단단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흔들리지 않고 사만다를 향해 가는 그 뒷모습은 너무나도 큰 감동을 주었다.

시릴은 이런 삶의 파편들을 어떻게 모아 어떤 어른으로 성장할까 궁금했다. 

분명히 나무 같은 어른이 되어있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태풍이 지나가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