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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x Jun 24. 2017

8.9 여행에도 휴식이 필요해

파리는 비온 뒤 맑음

언제나 계획대로 된다면 그건 여행이 아닐 것이다. 여행자는 꼭 한 번쯤 예상치 못한 순간들을 만나게 된다.

나에겐 이 날이 꼭 그 날이었다.

어제의 그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눈을 떠 보니 밖은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같은 숙소를 쓰던 사람들도 고민을 하더니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밖으로 나갔다. 우린 그동안의 무리한 일정과 컨디션 난조로 다른 이들보다 심하게 망설였고 비를 피해 오늘은 숙소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신기하게도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빗줄기가 거셌다. 하루 정도는 쉬어줘도 되나, 내가 어떻게 온 여행인데 이렇게 하루를 통으로 날리다니 하는 불안감이 들끓었다. 하지만 여행은 퀘스트를 깨나 가야 하는 게임이 아니었다. 오늘의 예상치 못한 순간이 만들어가는 게 여행인 것이다.

와인 한잔과 간단한 안주거리를 꺼내 로비의 식탁에 펼쳐놓았다. 여행을 떠나온지 2주가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친구와 한참을 웃으며 그 짧은 시간들을 마치 오래전 일 처럼 회상했다. 즐거운 추억놀이가 끝나면 한국의 노래로 오전을 보내고 오후에 일정을 마치고 들어온 여행자들과 여행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아쉬울 것 없는 여행의 하루였다.




오늘은 파리의 마지막 날 었다. 내일이면 떠날 파리의 마지막 날은 여유롭게 돌아다니기로 했다. 어제 계획대로 해야 한다는 여행의 강박을 버리고 나니 한결 편해졌다.  맛있는 것도 먹고 그동안 지겹게 쏘다닌 파리의 거리들을 구경하는 날로 정했다.


어제도 내내 비가 우리나라 장마철처럼 쏟아지더니 오늘은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아침부터 약국에 가 간단한 선물들과 화장품들을 구입하고 나왔다. 하늘은 회색빛이었고 우중충했다.


 


뮤지엄 패스를 마지막으로 사용할 작정으로 노트르담 성당을 갔다. 노트르담 종탑을 오르기 위해서였다. 노트르담 성당 근처는 비가 오는대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막상 뮤지엄 패스의 날짜는 지나있었고, 다시 한번 노트르담 성당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곳을 떠났다.

마침 점심때라 근처인 생 미셸가 근처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우산을 쓰고 걷는 길은 또 그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날씨도 좋지 않고 비에 여기저기 젖어있던 터라 숙소를 나올 땐 기분이 썩 좋진 않았지만 사람이 북저이는 곳을 벗어나니 콧노래가 나왔다.

여러 거리들을 기웃거렸다. 블로그나 여행책을 이용해 그 어떤 정보도 알지 못했지만 그동안 샌드위치로 연명하던 가난을 집어던지고 마지막 식사는 사람처럼 먹어보기 위함이었다.




끌리는 캐주얼 레스토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약간 이른 시간이라 손님은 우리들 뿐이었고 메뉴판을 집어 들어 점심 코스 요리를 시켰다. 애피타이저부터 디저트가 나오는 코스요리였지만 맛보단 분위기가 더 좋은 곳이었다. 모험은 실패로 끝났지만 한참을 웃으며 얘기할 에스까르고의 씁쓸한 추억이 생길 터였다. 문을 활짝열어두었던 레스토랑에서는 밖에는 보슬비가 오고 있었고, 안의 조명은 따뜻했다. 온 거리가 젖어있던 그곳의 비 냄새와 달그락거리건 식기의 소리 뒤에서 들리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도 잊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점심을 먹는 동안 비가 그쳤다.

레스토랑이 있던 곳은 소르본 대학가 쪽이라 근처에 조금만 걸어가면 뤽상부르 공원이 있었다. 아주 가까운 거리라 걷기로 했다.   


뤽상브루 공원은 미리 파리에 여행을 다녀온 친구도 꼭 가보라고 추천했던 만큼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생 제르망 거리에서 소르본 대학이 있는 거리로 들어서 쭉 뤽상브루 공원까지 걸었다. 거리는 매우 정돈되어 있었고 깔끔했다. 샹젤리제 거리의 화려함과는 다르게 약간 수수한 느낌마저 들었다. 곧게 뻗은 가로수들이 껑충 솟아있었다. 고개를 한참 들어야 나무의 꼭대기가 보일 정도였다. 내가 걷고 있던 바닥에는 키 큰 나무들이 만든 나뭇잎 그림자와 그 틈틈이 들어오는 햇빛이 점점이 박혀있었다. 비가 그친 후의 그 맑은 공기의 냄새와 푸릇한 나뭇잎의 냄새가 코끝에 밀려왔다.


비온 뒤 갠 맑은 하늘
각 잡고 정돈된 뤽상브루공원의 조경



비가 갠 뒤에는 정성 들여 닦아놓은 유리알처럼 투명한 하늘은 만국 공통이었다. 공원의 문에 들어선 순간부터 난 이 곳을 사랑하게 되었다. 진부한 말일지라도 진심이었다. 사진으로 내가 이곳에서 느낀 공기와 푸름 북적이면서도 조용함 그 모든 것을 전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눈으로 본 풍경에 감탄하고 사진을 찍고 뷰파인더에 나온 반도 안담긴 풍경에 실망하고 또 다시 고개를 들어 눈에 들어온 모든 것들에 감동하고의 반복이었다. 

하늘과 나뭇잎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곳이었다. 태어나서 공원은 처음 본 사람인 양 그곳을 둘러보았다. 영국의 공원은 나무숲을 이룬, 마치 저절로 거기에 있는 곳이었던 양 싶었다면 이 곳은 여러모로 손길이 많이 닿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무 하나 조각상 하나 공원 안 건물 하나 사람의 손이 안 탄 곳이 없어 보였다.

공원 한가운데 있는 호숫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선탠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여행 처음으로 여유로운 휴식이었다. 사람들 구경, 사진 찍기가 끝나고 멍하니 의자 두 개를 붙여 누워 하늘을 봤다. 나른해지는 기분과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내 머리 위에 느껴지는 햇살과 살가운 바람을 느꼈다. 영영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뤽상부르공원에 갑자기 몰려온 먹구름

그렇게 공원에 누워 여유를 떨고 있을 때 갑자기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맑은 하늘에 무슨 천둥 소리야 싶어 천둥소리가 아닌 줄 알았지만 어느새 먹구름이 몰려들었고 다시금 비가 올 것 같았다. 비를 피할 곳이 없었던 터라 공원에서 짐을 챙겨 근처 카페로 가기로 했다. 비도 피해야 하긴 했지만 화장실이 몹시 가고 싶어 졌던 것이었다.(뤽상브루 공원 화장실이 있었지만 문이 잠겨져 있었다)


사실 파리에서 제대로 된 디저트 하나 먹지 않고 떠나온 나이지만 여행 때까지만 해도 디저트에 대해 별로 관심도 없었거니와 돈도 없어서 큰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그래도 어떻게 아무것도 안 먹고 가나 싶어서 프랑스의 체인점 PAUL에서 밀푀유와 타르트를 사서 먹어봤다. 프랑스에서는 동네 구멍가게에 들어가서 빵을 먹어도 맛있다는 말은 가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느덧 밤 9시가 되어 야경을 보러 에펠탑 근처로 향했다. 파리에 머문 일주일 동안 숙소가 중심가에서 멀어 항상 해가 지기 전에 숙소로 들어갔었다.  파리의 야경은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터였다.

신기하게 시간이 맞아 같이 여행 온 친구의 지인들과 같이 야경을 보기로 했다.  유럽 여름의 해는 밤 10시가 넘어 지기 때문에 숙소를 멀리 잡아 야경을 볼 수 없었던 우리들은 중심가 바로 근처에 숙소를 잡아 매일매일 맥주와 야경을 보냈다는 지인들의 소식에 부러움에 눈물을 머금고 바토무슈에 올랐다.

바토무슈는 내 일주일의 파리를 요약하여 정리해 주었다. 그동안 따라 걸었던 센강의 거리를 센 강의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내부에서가 아닌 외부에서 박물관들과 성당들을 바라봤다.

10시에 출발하는 바토무슈를 탔는데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에펠탑의 야경을 구경하기 위한 피크 시간이었기 때문 일터였다. 키가 작았던 나는 난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면 경치를 잘 구경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뒤의 내 행동을 느꼈는지 한 노부부가 웃으며 자리를 양보해 줬다. 그 작은 친절에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이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땡큐가 전부였다. 눈을 반짝이며 센 강의 바람을 맞고 있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나에게 자리를 양보해주었던 노부부가 사진을 찍고 있었고 이때다 싶은 나는 시야를 확보해 주기 위해 무릎을 굽혀 허리를 숙였다. 갑작스럽게 확보된 사진의 시야를 발견한 노부부는 집중하던 카메라의 시선을 나에게 던졌고 호탕하게 웃으며 나에게 고맙다고 말을 건넸다.


베터리가 방전되기 전 마지막 파리사진

파리는 마법 같은 도시이다. 처음의 그 불쾌한 지하철의 이미지와 지하철에서 마주친 현지인마저 가방을 조심하라며 걱정어린 경고를 해주던 소매치기의 나라지만 어쩐지 불쾌한 기억은 없었다. 아마도 파리에 있는 내내 불친절한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는 행운과 그동안 들어온 파리라는 도시의 신화 때문인지도. 

그렇게 파리의 마지막 밤이 끝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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