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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르보르 Jun 27. 2023

주방이라는 조금 다른 작업 공간

설거지를 하는 동안 묘한 일이 생기곤 한다. 하기 전엔 그렇게 귀찮아서 딴 거 먼저 할 것 없나 빠져나갈 궁리를 하다가도 막상 시작하면 하나하나 깨끗이 씻겨지는 그릇들을 정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러다 보면 콧노래를 흥얼거리게 되고 문득 꼬였던 생각이 풀리거나 마음에 쏙 드는 아이디어가 솟아나곤 한다.


"브라보~ 설거지는 역시 대단해!"


요리를 할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시작하기 전, 또 빠져나갈 궁리를 한다. '사 먹는 게 어때?' '대충 때울 방법 없을까?' 하지만 그 순간을 잠시 견디고 나면 야채를 다듬고, 곡식을 씻고, 고기를 녹이며 요리를 즐기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손수 요리를 하면서 먹는다는 것의 소중함과 신성함을 절로 느끼게 되었다. 스스로에게 먹일 건강한 식재료를 신중하게 고르고, 식재료가 신선하게 보관되도록 하나하나 꼼꼼히 신경 쓰면서 먹는다는 것이 단순히 배를 채우거나 쾌락을 느끼기 위한 수단적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음식이 나를 만들고 내 삶의 바탕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자 더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음식을 대하게 되었다.  더구나 이 음식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세상의 노력이 들었을지를 생각해보면 당근 한 조각, 밥 한 숟가락에 깃든 신성함에 감격하게 된다.


만약 내가 사람이 아닌 다른 동물로 태어났다면, 하루하루 먹기 위해 얼마나 절실하게 분투했을까? 오늘은 풍족하게 먹었더라도 내일의 식량은 결코 보장되지 않는 것이 야생 동물들의 삶 아닌가? 지금도 세렝게티에선 사냥에 실패하여 굶어 죽어가는 새끼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어미 치타가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어쩌면 그 치타의 삶을 경험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동물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지금처럼 풍족한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매일 이렇게 건강한 음식들로 영양을 공급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그러니 음식을 대할 땐 겸허해지게 된다.


옥수수를 삶고, 단호박을 찌고, 눈물을 흘리며 양파를 썰고, 잘 익은 밥의 향기를 맡으며 이 모든 순간 속에 깊은 감사를 느낀 오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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