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만 켜면 아이가 나온다.
세상 모든 여자가 아이를 '어쩔 줄 모르게' 좋아하는 건 아니다. 아이를 아주 많이 좋아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아이를 싫어하는 건 아니고. 어릴 때부터 결혼이나 육아에 대한 생각이 좀 확고한 편이었다. 물론 한 해씩 지나면서 생각이 차츰 다듬어지긴 했지만, 어찌 됐든 그것들을 비교적 현실적으로 바라보는 쪽이다. 부모님께서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결혼에 대해 사실적인 부분들을 굳이 가리시는 분들이 아니셨고, 그래서 환상도 필요 이상으로 없다. 탓 하는 게 아니고, 감사한 부분이다. 무슨 말이냐면, 결혼과 육아라는 걸 절대 뺄 수 없는 '절차' 같은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다. 결혼을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출산과 육아도 물론이고, 명확하게 이것들은 선택의 영역이다.
사람들이 "이런 애들이 시집 제일 빨리 간다"고 말해주는 부분인데, 아주 어릴 때부터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했던 건 결코 어린 마음에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 말을 뱉었던 마음을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엄마는 어린 딸에게 시집 안 가도 되는 거고, 이왕이면 가지 말라고 아주 단단히 말씀하셨다. 지금은 어떻냐고 묻는다면, 큰 틀은 거의 비슷하지만 이젠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는 대로 섞여 살아야 하지 않겠나 싶은 생각이 좀 더 비집고 들어온 정도다. 이건 이야기가 많이 길다. 이건 언제든 좋은 안주가 될 수 있다.
둘러왔지만 어쨌든 임신이라는 게, 그러니까 결혼과 한 세트를 이루는 구성품으로서의 임신이 필수 구성품은 절대 아니라는 거다. 이건 개인적인 견해이고, 나는 인생의 목표가 결혼과 육아는 아닌 사람이다. 싱글맘이며 미혼모며, 그들의 선택과 인생을 늘 존중하고 존경한다. 누구든 임신이라는 건 스스로 선택한 경우에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좋은' 것이어야 한다. 저렇게 살면서 아이를 어떻게 키우겠냐거나, 그런 식으로 생긴 애를 뭐하러 낳아 키우냐거나, 그런 건 애초에 말도 안 되는 말. 뭘 하든, 뭘 하지 않든 모든 건 각자의 선택인 거다. 도덕 교과서 같은 말이지만 생각보다 많이들 되새기지 않는 거라, 굳이 구구절절 말해봐야 할 것 같았다.
뭔가 인생의 과업들 중 몇 단계 쯤에 있는 것만 같은 결혼의 문을 꼭 넘지 않더라도, 임신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정확하게 '육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임신'에 대한 이야기인 거다. 원론적으로는 분리할 수 없는 영역의 것들이겠지만 그럼에도 굳이 따로 떼어내서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사실 임신이라는 단어 자체는 아주 기쁜 것이거나, 상상하기도 싫은 두려움이거나, 둘 중 하나다. 선택이 달린 영역이라는 거다. 선택하지 않은 여성에게는, 그러니까 선택하지 않은 미혼 여성에게 이건 세상에서 가장 불안한 시간들의 끝에 찾아오는 두려움의 덩어리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다들 피임이니, 콘돔이니 하는 단어들을 입 안에서 내보낼 때 덜 쭈뼛거린다. 정확하게 이건 세상이 그나마 좀 정확해진 거라고 말하고 싶다.
아이를 좋아하든 아니든, 당장 내년에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은 사람이든 아직 육아는 인생 계획에 넣지 않은 사람이든, 뭐가 어떻게 된 사람이든 그들의 선택에 동조까진 아니더라도 협조는 해 줘야 한다는 말이다. 생리 전 증후군을 완화할 목적만으로도 비싼 처방전 따로 끊어서 약 값까지 또 들여가며 매일 똑같은 시간에 정신 잘 차려 피임약을 챙겨 먹는 여자들이 많아진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니 어떤 목적으로든 일 년 내내 여자가 피임약을 챙겨 먹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그게 부작용이 어떤 건지나 아는지. 또 도덕 교과서 다른 페이지 같은 소리겠지만, 인생의 많은 선택들 중에서도 이건 쌍방 책임의 선택 영역이라는 거다. 콘돔 좀 '써달라'고 할 문제가 아니다. 그건 상호 간에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지켜야 할 불가침의 이행 영역이다. 그 선택의 순간에 감정적이거나 로맨틱한 줄로 알고 말도 안 되는 소리나 뱉어내는 남자라면, 정신 잘 차려야 하는 거다.
끔찍하게 불안한 시간들을 지나본 적이 있다. 그동안의 생에서 가장 큰 둘레의 생각을 했던 시간들이었다. 원점으로 다시 돌아온 지겹고 빡빡한 일상이 그렇게나 반갑고 감사한 적은 처음이라는 생각과, 이런 고통의 시간들과 말도 안 되는 굴욕적인 감사함을 널 뛰듯 여자가 혼자 오롯이 느끼면서 속이 썩어 곪아들어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 엄청난 분노와 적개심을 품었던 걸로 기억한다.
주변에서 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은 아직 없다, 선택한 것이든 그렇지 않은 안타까운 것이든. 임신과 유산이라는 두 단어가 나란히 서 있는 걸 보고 내가 먼저 떠올린 건 선택한 쪽의 유산이었다. 나이의 요인일 거라 생각한다. 법에 위배되고 그렇지 않고를 말하려는 게 아니고, 선택과 그 선택에 따르는 무게에 대한 걸 말하려는 거다. 낙태를 악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저런 조건을 붙여 또 물어보면 다시 또렷하게 그대로 대답할 거다. 나는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아이에 대한 죄책감이나 안타까움보다는 내 인생에 대한 선택이 훨씬 더 크고 중요한 시기를 살고 있다. 그들도 그런 마음으로 선택하는 것일 거라는 판단이다. 이기적이든 비윤리적이든, 우선은 그게 우선이다.
아무리 봐도 결혼 일찍 할 위인은 아니라는 게 엄마와 나의 공통된 결론이다. 인생계획에 결혼과 임신이라는 단어들이 좀 늦게 등장하거나, 등장할지 아닐지도 잘 모를 계획이다. 뭘 하든 안 하든 내 선택이다. 선택에 협조해주고 동조까지 하는 사람이라면 더없이 좋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