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풀2>, 죽음의 무게는 누구에게나 똑같고 안타깝지만 의미는 다르다.
몇 주전 절친의 장모님께서 투병중 소천하셔서 밤늦게 문상을 다녀왔습니다.
도착해 기차역을 나서자 연말연시에 화려한 조명으로 장식된 가로수 길이 눈에 들어왔고,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프랑스 개선문 위에서 보는 샹제리제 거리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장례식장을 찾아가는 길에 만난 아름다운 야경은 묘한 느낌을 주더군요.
시간은 짧지만 장례시장에 가야 만날 수 있는 선배님과 동기들을 만나 한시간 동안 수다를 떨고 올라왔습니다.
"지병이 있으셨나... 응 작년부터.."
"선배님 10년만이네요 어디서 개업하고 계신가요?"
"너는 교수 그만두고 요새 도대체 뭘 하고 사냐?"
"좀 쉬고 있어요. ^^ 개업가에 잠깐 일을 해보니 수가의 현실이 참 그렇더라구요.."
"개업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해. 점점 더 힘들어져."
"아... 병원장이 느닷없이 바뀌었던데 분위기는 어때?"
"파킨슨 환자에서 장내세균 연구 IRB는 통과가 되었냐?"
"FMT 쥐 실험은 검사 샘플을 뭘로 할꺼야? 구체적인 방법을 빨리 정해야지"
"그래야지.. 그런데 NGS분석하려면 돈이 많이 들텐데 연구비는 있나?"
이야기는 흘러 흘러 고3 자식 때문에 학원 데려다주고 커피숍에서 두 시간씩 멍때린다는 등등..
누군가를 이 세상에서 떠나보내는 이런 장례식장에서는 누가, 얼마나 살다가,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매우 다릅니다. 비록 아쉬움은 있지만 슬픔보다는 오히려 편안한 마음에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살아가는 이야기로 밤을 새우는 곳도 있고, 또 그 반대로 너무 황망하여 슬픔이 가득 차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문전 친구를 기다리며 잠시 장례식장 로비에 서 있는데 안내 모니터를 보니 상주로 (아마도) 어린 아이의 이름이 올라가 있고, 넋이 나가 멍한 제 나이 또래의 망자의 배우자를 지인들이 문앞에서 눈물로 위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정확한 사정을 잘 모르지만 그냥 그 장면만 봐도 가슴이 먹먹해지더군요.
얼마전 본 <데드풀2>의 한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이 죽은 후 주인공이 술집에 앉아 한탄하는데 옆에 앉은 긴 수염의 덩치가 한마디 해줍니다.
"According to the Kubler-Ross model, the now is just one of the five stages of the grief."
세상에서 제일 막 사는 것 같은 데드풀의 주인공도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 앞에서는 깊은 절망과 따러서 죽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데드풀의 지저분하지만 어른스러운 위트를 좋아하는데, "퀴블러 로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부정(denial) - 분노(anger) - 타협(bargaining) - 우울(depression) - 수용(acceptance)의 모델이 등장할지는 몰랐습니다.
이는 죽음을 앞둔 사람의 심리단계로 알고 있었는데 이 영화를 통해서 애도나 일상생활의 심한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도 확장되어 사용된다는 것을 배웠네요.
그러면서 막차를 타고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에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죽음, 고 임세원 교수 장례식이 생각이 났습니다.
친구들 중 한명은 공보의때 같이 지냈었는데 참 좋은 사람이었다고 울분을 토하더군요.
고 임교수는 이런 죽음의 단계를 느낄 겨를도 없이 어처구니 없게 세상을 떠나버렸고, 이제 남은 가족과 동료들이 고스란히 애도의 감정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저의 grief reaction의 단계는 "분노"와 "우울"이 동시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장례식장에서는 제 정형외과 친구도 진료실에서 칼을 꺼내든 환자를 마주했던 공포스러운 경험을 말했었고, 한 외과 선배가 몇년 전 칼에 찔려 수술을 했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죽음」이 그 결과였다는 거지요.
이미 이전에 이런 일들이 있었다면 예방책이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이런 일이 생기면 의례 그렇듯이 행정당국은 우리 잘못은 없어.. 하면서 실태 점검을 한다고 합니다.
복지부는 진료실 내 대피통로 마련·비상벨 설치·보안요원 배치·폐쇄병동 내 적정 간호인력 유지 여부 등 실태를 파악하기로 했다는 군요. 결국 이런게 안되어 있으면 병원의 책임을 묻겠지요.
고3 학생들이 강원도에 놀러가서 사고가 난 후 (현장 경험이 없는) 교육부장관은 각 학교의 체험학습 실태조사를 하겠다고 해서 논란이 있었던 게 다시 생각이 납니다.
또 의료인 안전 논란때마다 그정도 배짱도 없으면서 환자를 보느냐고 말했던 모 환자대표(? 이사람을 누가 환자들의 대표로 뽑았는지) 가 생각이 나더군요.
그러나 막상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면 쉽게 답이 떠오르지도 않습니다.
유난히 한국에서 일하는 의료인으로서 무기력감을 느끼는 지난해였는데 이번 사건후, 특히 임교수의 발인이 있던날 아침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서 조의금 통장을 개설했다는 것이 생각이 나서 조의금을 입금했습니다.
그나마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지만 사실 이런 일은 외부에 어떻게 보일지, 최근 한국 사회의 상황에서는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의사 하나 죽었다고..."로 시작하는 댓글을 가끔 보면 기가 막히더군요.
제가 문상을 다녀온 소천하신 친구의 장모님이나, 태안 화력발전소의 김용균씨의 죽음이나, 화성 공장에서 자동문을 설치하다 사망한 분이나, 또 의사의 죽음이나 죽음의 무게는 누구에게나 똑같고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의 죽음이 주는 메세지는 약간씩 다르게 느껴집니다.
특히 제가 동료로서 느끼는 안타까움은 더 클 수 밖에는 없습니다. 또 이런 사건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 얼마전 또 임신한 여의사가 조현병환자가 휘두른 칼에 다치는 일이 벌어졌었지요.
본인도 우울증을 겪었었다는 임교수의 저서 <죽고싶은 사람은 없다>라는 제목이 더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저에게는 고 임교수님도 그렇지만 가족들의 자세가 참 놀라웠습니다.
이번일로 정신질환 환자들에 대한 편견이 생기질 않기를 바라고 또 조의금은 장례비용을 제외하고 다시 모두 병원과 학회에 기금으로 기부를 했습니다.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진료환경의 안전이 확보되고, 고 임교수님이 힘든 환자들을 돌보려고 했던 그 의지가, 특히 자살을 예방하려고 노력했던 것들이 더 널리 퍼지기를 기도합니다.
남은 가족들에게 위로와 평안이 함께 하기를...
그리고 이 나라의 의료가 개선되어 환자와 의료진 모두에게 안전한 환경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