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 요즘은 저녁시간에 잠이 온다.
지난 주말 저녁 의자에 앉아서 졸다 깨보니 어느새 저녁식사 시간이 휙 지나있었다.
반 백수로 할 일도 없으면서 잠만 자느냐는 시선을 회피하며 차려준 저녁을 먹고 잠깐 TV앞에 앉았다.
적극적 바보상자인 인터넷 검색에 비해 TV는 수동적인 바보상자라고 할 수 있는데 가끔은 이런 특성이 기대하지 않았던 정보를 제공해 주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채널을 돌리다보니 여행상품을 팔고 있는 홈쇼핑 프로에서 우유니 사막이 등장한다.
오호, 남미라...
유럽, 일본, 동남아 등 뻔한 곳이 아니라 남니 여행코스는 어떤가 하는 궁금증에 보기 시작했다가 결국 20분 넘게 홈쇼핑을 보고 말았다.
이구아수 폭포, 티티카카호수, 스타라이트 투어, 살리네라스, 마추피추 등의 유명 관광지를 돌며남미 5개국 완전일주에 단돈 (!) 799만원이란다.
게다가 무이자할부까지...
정신없이 보면서 머리속으로 남미여행을 거의 다 한 느낌이었는데 홈쇼핑 호스트의 일갈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미여행은 나이들면 힘들어서 어렵습니다. 오늘이 여러분의 가장 젊는 날입니다.!"
아... 당장 이상품을 구입해 떠나야 할 것 같아 전화기를 들게 만든다. 대단한 멘트다.
남미하면 연상되는 것들.
축구, 마라도나, 브라질의 삼바 축제, 멕시코의 마약 갱단...
그러나 나에게는 어릴 때 보고 들었던 영화, 책, 그리고 음악 등에서 각인된 다른 이미지들이 먼저 떠오른다.
체 게바라, 아옌데, 민중신학, 미션, 산티아고, 쿠바, 하바나,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 탱고, 보사노바, 빌라 로보스의 브라질 풍의 바하 이런 것들이 머리속을 스쳐지나간다. 체 게바라, 아옌데, 민중신학, 미션, 산티아고, 쿠바, 하바나,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 탱고, 보사노바, 빌라 로보스의 브라질 풍의 바하
이런 것들이 머리속을 스쳐지나간다.
그 곳에 직접 가본 적이 없으니 나에게 남미라는 지역의 인상을 결정하는데는 인상적이었던 몇 개의 영화가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홈쇼핑에서 시작된 남미의 추억은 기억에 남아있는 당시 영화들을 몇 개 다시 찾아보게 한다.
1973년 9월 11일 칠레에서는 피토체트에 의한 군사 쿠테타가 일어났다.
그날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라디오에서는 "오늘을 산티아고에 비가 내립니다."라는 방송이 계속되었는데, 그것은 군부가 내보내는 쿠테의 시작을 알리는 암호였다.
민선으로 선출된 신사회주의 아옌데 정권이 재집권을 하게 되자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피노테트 장군이 무력으로 무너뜨린 사건이다.
이 영화는 칠레에서 망명항 엘비오 소토감독이 당시의 상황을 다큐형식으로 찍은 영화인데, 어디서 봤을까 기억이 명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5공정권이 무너지고 재판이 진행되던 시절에 TV에서 방영을 했었던 것 같다.
경호하던 경찰들마저 떠나버린 대통령 관저에서 대통령과 지지자들의 쳐들어온 군대에 맞서 총을 들고 버티다가 버리며 죽어가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분노와 안타까움에 같이 울컥했던 것 같다.
그냥 듣기에 평화롭고 서정적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산티아고에는 비가내린다" 라는 문장이 쿠테타라는 폭력의 시작을 암시하는 것이라는 묘한 대조가 인상적.
엘살바도르 잔혹한 군부정치에 대항하다가 군부가 보낸 암살범의 총격으로 죽음을 맞이한 로메로 주교를 그린 영화.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로메로 주교였지만 민중의 고통을 직접 목격하면서 비폭력의 신앙을 지키면서도 군부 독재에 대항했던 삶이 그려진다.
수녀들이 군인들에 의해 강간을 당하고 잔인하게 살해되는 충격적인 장면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로메로와 이 사건에 대한 내용이 올리버 스톤이 감독하고 제임스 우드와 존 새비지가 주연한 <살바도르>라는 영화에도 등장한다.
언제나 멋진 로버트 레드포드,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처음 알게된 레나 올린이 주연한 도박, 사랑, 혁명? 뭐 이런걸 잘 섞어놓은 영화.
데이브 그루신의 영화음악이 들을 만 하다.
남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 영화를 빼 놓을 수 없다. 굳이 설명이 필요없는 이 영화에서는 주연을 맡았던 로버트 드 니로, 제레미 아이언스라는 두 대 배우가 빛나던 젊은시절에 펼친 훌륭한 연기를 볼 수 있다.
비교적 사실에 충실하게 묘사했다고 하는 선교마을과 이를 없애버리는 침략세력들, 그리고 원주민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그려진다.
이 영화에 대한 내용을 쓰다보니 그 유명한 영화음악 가브리엘의 오보에가 자연스럽게 들려오는 것 같고 또 정말 놀라운 장면, 이구아수 폭포를 따라 떨어지는 신부가 묶인 십자가의 강렬한 장면이 떠오른다.
나중에 아옌데 (Salvador Guillermo Allende Gossens,) 대통령은 소아과 의사였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남미 혁명의 아이콘이만 아이러니칼 하게도 상업화의 대표적 대상이 되어 면티의 프린트물이 되버린 체 게바라 역시 의사출신이라 나에게는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체 게바라에 관한 영화는 본 기억이 나질 않는데 2004년 개봉된 모터싸이클 다이어리 (The Motorcycle Diaries, Diarios de motocicleta, Walter Salles 감독)는 체게바라와 사촌 오토바이로 남미를 여행하며 민중의 삶에 눈을 뜨게되는 내용인데 언젠가(!) 봐야겠다고 아껴놓은 영화 중 하나.
사실 정치와 역사에 대한 명확한 이야기를 하기는 쉽지않다. 관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선교사들의 활동라는 것도 어찌보면 그와 동반된 침략의 측면이 있고, 남미 카톨릭이 독재 정권과의 관계에서 평화에 대한 얘기를 하면 협조와 방관이 되기도 한다.
또 아옌데나 체 게바라가 독재와 제국주의에 저항하고 국민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잡았던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국가 운영 능력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도 많다. 아옌데도 과연 국민들의 삶을 개선했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고 체 게바라는 쿠바의 중앙은행장과 산업부 장관을 하면서 보여준 무능함, 혁명이후 반대파의 숙청과 처형 등의 논란거리가 있다.
투쟁과 국가 경영은 역시 다른 분야이고, 이렇게 피땀흘려 민주화에 노력했던 남미의 국가들 상황, 특히 지금의 베네주엘라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물론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강대국들 틈바귀에서 (특히 미국의 간섭) 어쩔 수 없는 면도 고려를 해야 하지만 결국 국민들을 먹고 살게 해주는 것은 정치인들의 기본적 책임이 아닌가 싶다.
다른 나라의 군부 쿠데타와 신부의 죽음에 울분을 토하고 목숨을 건 선교에 감동받던, 남미 의사들의 멋진?면에 감탄하던 10대와 20대를 지나, 지금은 좋은 것 같지만 합리적이지 않고 유지될 것 같지 않은 한국의 의료체계와 그것을 이용하며 폭탄돌리기를 하는 정치계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있으면서, 18세기 남미 원주민이 아닌 21세기 한국인을 대상으로 어쩔 줄 몰라하며 오히려 더 세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한국 기독교계에 대한 우려를 하고 있는 오십을 목전에 두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