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도 살짝 수그러드는 이런 계절에 아무 생각 없이 추리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면 딱이다. 추리소설을 꽤 좋아하는 편이라 읽은지 몇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책들이 있다. 지금 당장 책장에 꽂힌 추리소설 중 한 권을 골라 카페에 나가자고 하면 단연 스페인 작가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의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을 선택할 것이다.
이 책은 유럽 역사와 미술사에 관심이 있고, 또 지적 유희를 느끼면서 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추천하고 싶은 소설이다.
이 소설을 통해 플랑드르(Flandre) 지역의 미술을 따로 분류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지만 그런 게 있나 보다 하다가 몇 년 전 그 작품들을 직접 본 후 그 매력에 푹 빠졌고, 그 중에서도 좋아하게 된 화가 중 한 명이 바로 Rogier van der Weyden (1399 - 1464)이다.
플랑드르는 지금으로는 벨기에의 북쪽과 네덜란드의 남쪽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인데, 내 나이 또래라면 기억을 할 수 있을 <플란다스의 개>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이 만화의 원작은 영국 소설이기 때문에 플랑드르의 영문 표기인 Flanders를 사용했다.
어릴 때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사실.마지막 회에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주인공 네로는 평소 그렇게 보고 싶었지만 돈 때문에 보지 못했던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림 Descent from the Cross>의 그림을 보기 위해 성모 마리아 성당으로 몰래 들어가 파트랴슈와 함께 그림을 보며 추위 속에 세상을 떠난다.
어린이들이 보는 만화영화에서 이런 식의 결말은 좋지 않은 것 같다. 적어도 애들에게는 해피엔딩이 필요한데..
이런 이야기에도 등장할 만큼 그림은 이 지역 사람들에게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이 지역의 기원은 9세기경 플랑드르 백작령에서 시작한다. 약 500년간 유지된 이 세습 국가는 모직물 공업과 중개무역의 발달로 부를 쌓았으나 오히려 그러한 지리적 중요성으로 인해 여러 나라에게 통치를 받거나 합병되는 힘든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무튼 먹고사는데 여유가 있어야 예술이 발달하기 마련이라서 지리적 요건과 함께 예술이 발달할 수 있는 경제적 부흥이 되면서 이태리 예술과는 다른 독특한 화풍이 생기게 된다.
이들은 유화라는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템페라 기법으로 대표되던 르네상스 이탈리아 미술과는 다른 특성을 보여준다. 즉 빠르게 그려야 하고 수정이 쉽지 않던 이전 그림에 비해 오일에 물감을 섞어 사용함으로써 세밀하고 정확한 그림을 그릴 뿐만 아니라 선명한 색감을 살릴 수 있게 되었다.
우피치에서 봤던 Botticelli의 <비너스의 탄생 The Birth of Venus>과 같은 템페라 기법의 작품은 아주 화사하고 "아 정말 예쁘다!" 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하는 그림이라면 플랑드르 화가들의 작품을 보면 사진을 보는 듯한 생생함이 느껴진다. 마치 PDP 화면의 부드러운 화질과 요즘 나오는 QLED 화면의 쨍하고 해상도가 높은 화질에서 느낄 수 있는 차이와 비슷한 것 같다.
인쇄물이나 모니터를 통해 보는 그림의 경우 이런 질감을 느끼기가 어렵기 때문에 굳이 실제 작품을 보러 가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물론 현실적으로 직접 보러 다니기가 쉽지 않다는 게 문제이지만.
Eyck, The Arnolfini Portrait 1434
플랑드르의 대표적인 화가인 Jan van Eyck (1390-1441)는 유화 기법을 개발하고 오일에 섞은 물감을 얇게 여러 번 칠하면서 색감을 더 진하게 만들어 냈고, 또 색을 섞어서 사용하기도 했다. 영국 내셔날 갤러리에 있는 <The Arnolfini Portrait>가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작품이고 실사에 가깝게 그리는 Naturalism으로 후대에 영향을 크게 주었던 인물이다.
후대의 Weyden은 이 Naturalism에 "감정"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가미했다.
중세 시대의 그림에서는 주인공들의 표정이 없는데 Weyden 그림의 주인공들은 눈물을 흘리고 눈을 감고 있거나 손을 꽉 쥐고 있는 등의 섬세한 표현으로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인공들의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네로가 보고 싶어 했던 <십자가에서 내림>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죽음 이후 내려지면서 슬퍼하는 마리아와 주변인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수많은 유럽 화가들이 그렸던 주제이다. Weyden도 역시 이 주제의 작품을 그렸고 가장 유명한 그림 <The descent from the cross, 1435> 가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내리는 장면을 Weyden 그린 또 다른 제목의 <Lamentation of Christ, 1460-1464>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마우리츠하위스(Mauritshuis)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에 이곳을 전혀 모르고 방문을 했다가 이 작품을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마우리츠아휘스 미술관은 Vermeer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 한데,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한 시간 정도 기차로 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 작품 하나를 보기 위해 헤이그까지 가야 하나 고민이 되기도 한다. 작년에 암스테르담 방문 시 그래도 이 소녀의 얼굴을 직접 보기로 하고 찾았는데, 마침 Weyden의 작품을 보수하면서 그 공간을 일반인 들에게 공개하고 있었다. 이 미술관은 특이하게 마당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를 만들어 놓고 지하로부터 위층으로 전시를 관람하게 만들어 놓았다.
가방 보관하는 락커도 참 세련되게 만들어 놓았다.
원본 그림을 액자에서 꺼내어 보수하는 스튜디오 자체가 개방되어 관람객들이 볼 수 있게 해 놓았고, 이 그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특별 전시공간을 만들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죽음을 맞이한 예수님의 얼굴과 창에 찔린 옆구리, 무엇보다도 이를 보며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마리아의 표정 등을 확대한 사진들과 다른 그림들과의 비교를 통해 Weyden 작품의 특성을 한눈에 보여주었다.
<Weyden, Lamentation of Christ, 1460-1464>
게다가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Weyden의 또 다른 작품 <Entombment of Christ, 1460-1464>을 대여해 전시해 놓아 동시에 비교하며 감상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Weyden, Entombment of Christ, 1460-1464>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에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외에도 렘브란트의 초상화와 그림들도 있어서 역시 유럽의 미술관이 규모에 관계없이 회가 된다면 꼭 관람을 해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개인적으로 미술관을 갈 때마다 의학과 연관된 그림들을 찾아 보는 걸 좋아하는데 렘브란트의 그 유명한 <튤립박사의 해부 강의> 그림도 있었고, Jan Steen이 그린 중세의 의사들이 왕진한 모습이나 당시 민간요법으로 시행하던 피를 흘리게 하는 치료법은 <사혈을 하는 여인> 등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그림들이 많아서 기대 이상이었다. 철분결핍성 빈혈로 내원한 환자에서 아무리 검사를 해도 원인을 못 찾다가 나중에 사이비 의료시술로 사혈을 했다는 것을 알아낸 환자를 두명을 본 경험이 갑자기 생각이 난다. 21세기 한국에서....
Rembrandt, The Anatomy Lesson of Dr. Tulp/ Brekelenkam, An Old Woman Bleeding a Young Woman
Jan Steen, The doctors visit 1660-61, The sick girl 1660
Portrait of Rembrandt (1606-1669) with a Gorget/Steen, A girl eating oysters
Rembrandt van Rijn, Self-Portrait, 1669/Arent de Gelder, Simeon's Song of Praise, 1700
Willem van Haecht, Apelles Painting Campaspe, c. 1630